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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Oct 18. 2020

더블린에서 존버

런던 생각하며 이 악물고 버티기

더블린에서의 1년은 '존버'라는 말이 딱이다. 더블린 행을 결정했을 때 팀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평소에 티나게 더블린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더블린으로 옮긴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2018년 10월 6일, 히드로공항을 경유하는 루프트한자(LH 713LH 982)를 타고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존버'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니었다. 이왕 간 거 마음을 열고 더블린을 다시 보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나를 맞이한 팀 사람들의 따뜻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새 출발을 응원한다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팀원들이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물건을 보내 선물 꾸러미를 준비했다. 

팀원들이 각 나라별로 선물을 준비했다. 이탈리아 올리브오일, 프랑스 와인, 러시아 초콜렛 등등


그리고 더블린에도 좋은 게 많다며 나만을 위한 더블린 가이드를 만들어줬다.


이렇게 나의 더블린 생활은 기대와 감동으로 시작됐다. 무너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여러가지가 힘들었다. 우선 출장이 너무 많았다. 2018년 10월 6일에 들어갔고 거주증(Residential Permit)이 나올 때까지는 출입국을 할 수 없어 한동안 더블린에서 적응할 기회가 있었지만 거주증이 나오고는 줄줄이 비엔나처럼 출장이 이어졌다. 11월 27일-12월 10일 샌프란시스코 출장을 갔다가 더블린에 잠깐 돌아오고 연말 휴가는 한국에서 보냈다. 2019년 1월 12일 더블린 복귀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로마 출장이 잡혀 더블린 공항에서 하룻밤 자고 바로 로마를 향했다. (목적지를 바꾸는 게 새로 표를 사는 것보다 비쌌다.) 2월 14-18일, 2월 28일-3월 1일 두 번에 걸쳐 로마에 있는 번역 업체를 방문해 새로 모집한 번역사 책임자들을 교육했다. 그 뒤로 2월 11-22일 샌프란시스코, 3월 6-13일 베를린, 3월 14-20일 런던, 4월 22-26일 런던, 5월 6-10일 서울, 5월 13-17일 도쿄, 5월 27-30일 베이징, 6월 10-13일 바르셀로나, 6월 17-20일 파리, 6월 21-25일 밀라노, 7월 22-26일 서울, 8월 5-14일 샌프란시스코, 9월 9-11일 베를린, 9월 13-27일 샌프란시스코 출장이 이어졌다. 그 사이 개인적으로 런던에 가서 지냈던 것까지 포함하면 2-3주 이상 한 곳에 머문 적이 없는 날들이 이어졌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졌다. (세금 신고할 때 아일랜드에 실제 머문 근무일자를 제출해야 하는데 2019년 195일 중 54일에 불과했다.)


출장보다도 더블린에 못 있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건 집 때문이었다. 더블린은 housing crisis가 심각한 도시다. 구글이 더블린에서 채용을 늘리고 싶어도 직원들이 살 곳이 없어서 어렵다고 아일랜드 정부에 공식 호소문을 보낼 정도. 방 1개 화장실 1개짜리 손바닥만한 아파트도 상태가 좋다 싶으면 월세 2천 유로(약 260만원)를 훌쩍 넘는다. 더블린은 대중교통이 엉망이라 걷거나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 비슷한 시간이 걸려 사무실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집을 구하려니 제약이 크기도 했다. 에어비앤비 사무실이 있는 Docklands 지역에는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글로벌 IT기업이 몰려있어 수요가 높았다. 혼자 살고 싶었는데 2019년 새해가 되도록 괜찮은 집을 구할 수 없어 결국 하우스 메이트와 함께 지내는 방 두 개짜리 집도 보기 시작했다. 출장이 많아 비싼 월세를 내는 게 아깝기도 했다. 집 보러다니는 데 지치고 옵션도 없어 사무실에서 걸어서 10분 안쪽의 방2, 화장실 2 아파트를 계약했다. 이게 더블린 호러 스토리의 시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2019년 2월 26일 그 집에 들어가서 4월 19일에 짐 싸들고 나왔다. 집 구하는 것도 경험이 별로 없지만 하우스 메이트와 함께 하는 집을 구할 때 어떤 점을 신경써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하우스 메이트가 집주인이었는데 일단 그것부터가 피해야 하는 거라는 걸 몰랐다. 하우스 메이트가 세입자로 동등한 입장인 것과 집주인과 사는 건 완전히 달랐다. 부엌과 거실은 공동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살림살이가 가득해서 결과적으로 내 방과 화장실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집주인은 자기 방식을 조금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집에 먼지가 많고 나갔다 들어오면 오래된 집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람을 써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할까 제안했더니 자기가 집을 더럽게 쓴다는 말이냐며 화를 냈다. 더블린은 습한 곳이라 곰팡이가 골칫거리인데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면 습기가 들어온다고 질겁했다. 집주인이 헬스장을 간 틈을 타 잠깐 열어두고 했는데 미처 닫지 못한 날이 있었다. 다음 날 창문에 자물쇠가 잠겨있는 걸 발견했다. 이 날 결심했다, 더 이상 못 살겠다고. 


냉장고를 열면 역한 냄새가 나 집에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필요도 없는 야근을 하면서 샐러드를 먹거나 집에 바나나를 하나 사와서 방에서 먹는 생활을 했다. 기회가 되면 런던으로 날아가 "나의 아저씨" 집에 머물며 런던 사무실에서 일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지니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매니저에게 여기 더 이상 못 있겠다고 울먹였다. 한국에 있는 상담 선생님에게 SOS를 요청해 구글 행아웃으로 영상통화를 하며 엉엉 울었다.(사무실에서 이른 아침에 했는데 너무 울어서 팀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집으로 도망갔다.) 암흑기였다. 다행히 매니저가 런던으로 옮기는 걸 허락해줘서 5월부터 절차를 밟기 시작해 그 희망으로 버텼다. 물론 비자를 받는 과정은 전혀 순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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