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적극적 존엄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소극적 존엄사에 해당하는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있다. 연명의료결정제도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고 있다고 의사가 판단한 경우라면, 환자의 의향을 존중하여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3년 전 나의 외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였다. 엄마로부터 외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고, 엄마를 포함한 자식들도 그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하는데 동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부모님도 모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고 했다. 무의미한 치료를 받으며 남은 자식들에게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남편과 나는 함께 집 근처 병원에 방문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제출했다. 그저 생의 에너지가 다해 자다가 곱게 죽는 행운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난 늘 리스크에 대비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니까 의향서를 제출하는 것은 나다운 일이었다. 의미 없는 치료로 고통받을 나를 위해서도 지난한 돌봄으로 고초를 겪을 가족을 위해서도 그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믿는다.
어느 날 남편이 물었다. 자신이 연명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 의사가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물으면 동의해 줄 것이냐고. 반대의 경우라면 나를 편히 보내달라고 망설임 없이 말을 할 것 같은데, 내가 남겨진 자가 된다고 상상해 보니 느낌이 달랐다. 말문이 막혔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돌볼 수 있는 건강한 상태라면 쉽게 "산소호흡기를 떼도 좋다."는 식의 동의를 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내가 건강하고, 당신을 돌볼 수 있으면 쉽게 동의 못할 것 같은데"라고 답하니 남편은 "난 고통받을 텐데? 나 보내줘야지~" 했다. 내가 역으로 같은 질문을 하자 남편도 나와 비슷한 결의 답을 했고, 나는 "것 봐" 하고 웃으며 시시콜콜한 대화가 끝났다.
남편과의 짧은 대화를 통해 남겨질 사람들의 슬픔과 미련이 환자의 고통을 연장하는 선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슬픔, 미련, 도덕적 가치를 잣대로 당사자의 고통이 이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래서 더욱이 죽음을 선택하는 당사자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작년 말에 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이 조력존엄사를 허용해 달라는 내용의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알 수 없는 질병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버텨내며 '죽을 권리'를 외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는 삶의 군상들이 있었다. 그런 고통이 나와 내 가족을 반드시 피해 가리라는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올해 초에 헌법재판소는 조력존엄사에 관한 헌법소원을 정식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헌법소원이 있었지만 모두 기각되었던 전례가 있음을 떠올려보면, 조력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 아닌가 싶어서 반갑다.
네덜란드 전 총리 부부가 손을 잡고 의사 조력에 의한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70년을 해로한 부부가 서로의 생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느끼고, 누구 한 명을 남겨두기보다는 함께 마지막을 맞이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너무나도 이상적인 생의 마지막이 아닐 수 없다. 큰 고통 없이 남겨질 슬픔이나, 남겨진 자에 대한 미안함 없이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와 손을 마주 잡고 생에서 사로 옮겨가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언젠가 내 생명의 불씨가 약해져가고 있을 때, 남편과 손을 잡고 존엄하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행운이 오기를 바라본다. 단지 바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그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