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요일마다 상담센터에 간다. 그곳에서 나는 상담자가 아닌 내담자다. 머릿속으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이 내 입을 통해 선명해진다. 아직은 상담의 과정 중에 있어서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생각들이 많기는 하지만, 상담은 이런 쓸모가 있다. 조각조각 나있던 생각들이 모아지고, 희미했던 것들이 제법 선명해진다. 아, 물론 그 과정을 잘 유도해 주는 상담자를 만나는 행운이 필요하기는 하다.
상담선생님은 내게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라고 했다. 그런가? 때마다 여행도 다니고, 휴일에는 늘어져라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우면서 내 딴에는 '휴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라...
문득 남편이 나에게 집에서는 좀 쉬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게 떠오른다. 그렇다고 내가 매일같이 쓸고 닦고 정리하는 엄청난 살림왕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그럼에도 나는 집에서조차 분주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다 보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뭔가'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땅히 속 시원한 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생산성', '자기 계발' 같은 단어가 떠오르기는 하는데 딱 맞는 표현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죄책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기분을 씻어내기 위해 갑자기 이불빨래를 한다던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온다던가 하는 식으로, 뭐라도 한다.
자율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되고부터는 언제나 마땅히 해야 할 크고 작은 목표가 있었다. 되도록이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과 태도를 취했고, 어느 정도는 목표한 바를 달성하며 살았지만 목표가 사라지면 곧 허무해지곤 했다. 목표를 달성한 후에 느끼는 성취의 달콤함은 짧았다. 달콤함 뒤에 금방 찾아오는 공허함이 싫어 또 어떤 목표를 만들고 달성하고를 반복했다. 피곤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그 덕분에 이룬 것도 있으니 기특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의 기저에 숨어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불안이다. 움직임을 멈추면 물에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에 계속해서 남몰래 헤엄치고 있는 오리처럼(오리가 정말 이런 기분으로 헤엄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계속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가라앉는다는 것은 나에게 도태되는 것, 뒤처지는 것, 살아남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멈추면 죽는다'라는 것인가. 삶에 대한 태도가 꽤나 전투적인걸.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쉬거나 한가로이 풀숲을 어슬렁거리다가, 필요할 때만 각을 잡고 사냥을 한다. 분주한 것은 힘이 없는 동물들이다. 동물의 왕국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쫓겨 다니는 영양 한 마리가 나인가 싶다. 영양은 사자에 쫓기고, 그럼 나는 무엇에 쫓기는 것일까? 쫓는 것도 나인가. 아니면 무한 경쟁 사회?
잠시 헤엄을 치지 않아도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헤엄을 치지 않고 두고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 경험을 한다는 것은 헤엄을 치지 않아 보겠다는 결심과 실천이 필요한 것이나, 지금의 난 그럴 용기가 없다. 그랬다가 정말 가라앉아버리면? 인생에 리허설이란 없지 않은가.
쉰다는 게 도대체 뭘까. 지금까지 나의 휴식은 단순히 물리적 신체만의 휴식이었던 걸까. 몸의 휴식만으로는 '쉰다'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인가. 몸과 마음이 함께 쉬어야만 진정 '휴식'이 성립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쉬어야 하는 걸까. 목표를 줄여야 하는가? 요가나 마음 챙김 수련을 해보면 될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좀 더 나이가 들면 심적인 여유가 자연스럽게 더 생기지 않을까? 물음표와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아, 모르겠다. 아직은 답을 모르겠으니,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는 글은 이 정도로 끝맺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