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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혜미 Aug 14. 2021

안데르센의'미운 아기오리'재해석

해외에서 날개를 펼친 백조 한 쌍



 1980년대 대부분의 한국의 대기업에서는 사보라는 잡지를 사내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고 있었던 L기업의 사보를 읽다가 우연히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밝은 마음의 소유자이며 목적의식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여자가 나타나면 결혼하고 싶습니다'라는 그룹사의 어느 노총각의 인터뷰 기사였다. ‘목적의식’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일단 결혼을 하면 자신의 삶을 희생과 헌신이라는 이름하에 남편과 자식과 시댁을 위해 살아야 했던 어머니들을 보면서, 결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그 기사 속의 그 문장은 며칠 동안 뇌리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그 회사의 노총각에게 ‘내가 바로 당신이 찾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에 답장이 왔다. 그리고 우리는 경복궁 근처의 찻집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그 당시에 직장을 다니는 여성들은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압박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있어서 직장은 결혼을 하기 전에 잠깐 사회를 경험하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 적령기를 무척이나 강조했던 그 시절, 나는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져야 가정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많은 갈등을 하고 있었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독신을 주장했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미운 아기 오리’로 인식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종종 하곤 했다.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연애나 한 번 멋지게 해 보고 차라리 수녀원으로 들어갈까?’ ‘어떻게 하면 오리 떼로부터 탈출하여 우아한 백조로 변신할 수 있는 걸까?’   


 그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그에게 왜 그런 조건의 배우자를 찾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저의 어머니는 보수적인 장남인 저의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을 한 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온전히 가족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사셨지요. 그런데 연세가 들면서 어머니는 자신에게 그런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늘 원망하셨어요. 그런 노후를 보내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했답니다.  목적의식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배우자를 만나서,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노후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라는 의외의 답변을 듣게 되었다.


 그와의 10개월 간 교제 끝에 결혼을 했다. 나의 '목적 있는 삶'을  존중하고 배려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고 있었다. 신혼에 아이를 갖게 되었고, 병상에 누워계시던 시아버지의 치매가 악화되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회사일에 몰두하여 주말에나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남편, 10년 동안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착한 며느리’라는 칭찬을 들었지만 이건 결코 내가 원하던 삶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결혼이기에 나는 묵묵히 나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었다. 10여 년을 병상에 계시던 시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여성 참정권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정한 ‘뉴질랜드’로 아이와 함께 교육이민을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뉴질랜드 임시 영주권을 받아 든 남편은 어느 날 이민 포기를 선언했다. 그동안 대기업에서 쌓아온 전공에 대한 경력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가서 생계를 위해서 아무 일이나 시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아이를 위해 꼭 교육이민을 가야 한다면 둘이만 가서 목표를 꼭 이루라고 오라고 했다. 뉴질랜드에는 여성 수상, 여성 CEO, 여성 국회의원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여성들이 대다수였으며, 노후에도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는 노인들을 보면서 나는 자신의 삶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현지 교회에 다니면서 친절한 뉴질랜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아이 교육을 위해서 먼 나라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용기 있는 여자’로 인정해 주며, 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나는 현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자원봉사를 하면서 장애자 단체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고 방학 때에는 캠프지도자로 봉사활동을 했다. “아시아에서 온 너의 의견을 말해줘. 우리와 다른 시각에서 본 너의 견해를 듣고 싶어”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미운 오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백조’로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는 영어로 우리와 소통을 하지만, 우리는 네가 영어 하는 만큼 한국어를 하지 못한단다”하면서 나의 부족한 영어능력을 격려해 주었다.  나는 40세가 이후에 꼭 해보고 싶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통신원, 기자, 칼럼니스트, 작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립하기 위해 한국을 알리는 다양한 일들을 해왔다.


10년 동안의 뉴질랜드에서의 기러기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된 것은 남편이 한국에서 퇴직을 하고 나서 운이 좋게도 싱가포르에 다국적 기업에 취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딸아이를 뉴질랜드에서 결혼시키고 나서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남편과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문화예술 칼럼을 쓰며, 한류를 홍보하는 다양한 행사들을 기획하고 취재했다. 남편은 한국에서의 경력을 살려 싱가포르의 직장에서 14년 동안 일을 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총 43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나는 남편과 2년 전에 호주로 이주했다. 우리는 그간 각자가 목적이 있는 삶을 이끌어 온 셈이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급변하는 시대에 인생의 후반전, 아니 연장전을 준비하면서 지금의 시간과 공간을 즐기고 있다.


 집 앞에 있는 골프장을 산책하며 호숫가에 있는 오리와 백조를 자주 마주친다. 같은 호숫가에 놀고 있지만 결코 같지 않은 그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간다. 내가 오리에서 백조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세대들의 희생과 헌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삶 속에서 늘 탐구해오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추구했던 '목적 있는 삶'이 가져다준 결과이며,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욕구와 전략이 있을 때에만 변신이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삶 속에서 무수히 많은 기회가 스쳐가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지 않으면 '백조'의 꿈은 사라지고 평생 '미운 오리'로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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