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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을 떠나서(11)

ep. 11 말 잘하는 사람

by 에미꾸


이탈리아에 도착한 순간 내 고향도 아닌데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집도 없고 여기에 살아본 것도 아니지만(여행을 다 합쳐 몇 달이 전부) 내가 편안함을 느낀 이유는 언어 때문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에서 영어도 독일어도 못하는 나는 집 밖을 나서면 거의 벙어리었는데, 이 부분이 사람에게 굉장히 위축을 줬다. '말을 못 해도 어떻게든 된다'라는 믿음은 있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말을 참 잘했는데 중학교 때 학교 대표로 도에서 진행하는 '말하기 대회'까지 나갔었다.(이 대회에 나가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게 된다. 입상도 못했다.)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도 '내가 한국말을 얼마나 잘하는데'를 속으로 계속 곱씹으며 나중에 나도 외국인한테 한국말 가르치면서 복수해야지(?)란 생각으로 꽤 열심히 공부했다.(웃음) 내 공부 방법을 잠시 얘기하면 정말 원론적으로 회화에서 효과적이지만 많이 도전하기는 힘든 외국인에게 외국어로 외국어 배우기였다. 내 이탈리아어 선생님은 이 당시 한국말을 거의 못했는데, 내 수업시간엔 나도 한국말을 못 하게 했다. 처음 몇 달은 머리와 광대가 너무 아팠다. 몇 개의 단어를 알아들어 거의 머릿속으로 소설을 썼고(다행히 눈치가 백 단이라 50프로 이상의 적중률을 보인다) 못 알아들으니 웃어야 해서 계속 미소를 유지하느라 얼굴에도 근육통이 올 수 있구나를 알았다. 서울에서 수업을 마치고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타면 바로 잠에 빠져들고 '억'소리를 내며 잠꼬대도 했다. 한 번은 내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 다음 도시까지도 갔다.


사실 이 방법은 본인이 스스로 기초적인 문법과 단어를 예습 복습을 하지 않으면 쫓아가기가 힘들다. 내 선생님은 절대로 단어를 외우는 숙제를 내주지 않았고 이해가 먼저이며 반복적으로 듣고 읽어 어투(톤)를 이해하는 게 먼저라 강조했다. 하여 항상 구술로 내가 이전 시간에 배운 것을 더듬고 찾아서 설명해야 했다.(본인은 어학당에서 고작 학기에 한번 있는 말하기 프레젠테이션을 힘들어했고 대본을 써서 외워갔다. 역시 내로남불이다.)(웃음)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주 4시간씩을 이탈리아어 과외를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뭐든 재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항상 소재를 바꿔서 공부하고 (동화책, 자격증시험, 영화, 유튜브 등) 질문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언어가 자연스럽게 쌓인 것 같다. 사실 작년에 한달살이를 나오기 전까지도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지 못했다. 현지에 떨어지고 나니 한국에서 공부한 것 치고는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많은 분들이 겪으셨고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답답한 일들에 대비해서 논리적으로 싸울 정도로 말을 배워 오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그 정도는 안 되는 것 같다.


컨디션 난조를 달고 이탈리아에 도착해 골골대는 가운데 체류허가를 위한 서류를 정비하고 방도 정리했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들과 물과 식자재도 필요한데 차로 장을 볼 수 없으니 발로 부지런히 걸어 종류별로 저렴한 마트를 가서 장을 봤다.(공산품은 가격차이가 2배나 났다) 지금 시간을 들여 돈을 벌지를 못하니 시간을 들여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크다. 더불어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가볍다.


이전 한달살이에서 겪었듯이 '이탈리아에 가면 이탈리아어를 엄청나게 많이 쓰고 말이 빨리 늘겠지'라는 기대와 달리 말할 사람이 없다. 이전에는 언어교환앱을 통해 돌파했는데 정말 좋은 언니(이탈리아인 벨기에거주 49세)를 만나 이탈리아 살이도 도움받고 같이 영상통화로 와인도 한 잔 하며 우정을 키웠다. 이 우정이 한국까지 이어져 시차를 극복하고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고 연애상담도 했다. 이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가 가까운 일본에 왔을 때 나도 엄마와 기꺼이 일본에 가서 한 나절 같이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오늘 오늘 숙소에서 떠나는 중국계 브라질 친구를 한 명 사귀어 이탈리아어로 대화했는데, 그 친구는 스페인어가 50프로 섞인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나는 그냥 근본 없는 이탈리아어로 서로 우정을 쌓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청소를 해주러 오신 아주머니에게 스몰톡을 시도하고 혼자 밥을 차려 먹기 시작한 이탈리아인에게도 'Buon appetito'(맛있게 먹어)라는 말을 먼저 건네본다.

(현재 단기로 학교에 부설로 달려있는 호스텔 같은 기숙사에 있다. 작은 개인 침실 이외의 모든 공간은 공용이다.)

다음 주부터 레슨이 시작되고 내일모레 이탈리아 선생님과의 약속도 있지만 마음이 조급해서 인지 계속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배고픔은 항상 화를 부르니 든든히 먹고 속으로 'Piano piano con calma'(천천히 하나씩 차분하게)를 외치며 내일을 기대해 본다.




아시아식품점에서 산 소스와 현지 마트에서 구매한 재료들을 잘 섞어 만든 '제육쌈밥'. 고추장을 아끼기 위해 토마토소스를 넣고 멸치액젓과 굴소스를 조금 넣는다. 맛이 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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