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 그냥 하는 거야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제일 좋은 점은 내가 나를 알게 된 것이다. 글 초반부터 가족얘기도 나오며 나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 나왔는데, 내가 나를 잘 알게 되니 삶이 덜 혼란스럽다.
20대 내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는 아마도 좋을 것 같은 것들을 마구잡이로 했었다. 지금 나란 사람을 만든 것 중 내 것이 아니었지만 억지를 부려 내 것이 된 것들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천성도 있다.
어릴 땐 부모님이 한숨을 쉴 정도로 돼지우리에 살았는데, 20대 후반이 되며 내 공간에 대한 애정이 생기자 침대를 깨끗이 하고 방을 아늑하게 꾸미기 시작했다. 혼자 자취를 할 땐 정말 호텔처럼 살았다. 매번 대청소를 하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습관처럼 조금씩 닦고 정리한다. 그래서 집에서 항상 바쁘다.(웃음) 어릴 땐 스트레스를 밖에서 풀었기 때문에 내 공간이 나에게 주는 가치가 없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집이 나에게 안식을 주는 공간이 되었고, 집에서 레슨도 했기 때문에 늘 분위기를 좋게 하고 살았다. (사실 내 직업은 영업직에 가깝다. 하여 밖에서 에너지가 많이 쓰인다.) 집이 어쩔 땐 스튜디오도 되고 파티룸도 되었다.
지나치게 태평한 성격은 사회생활과 욕심으로 붙들어 매 커버하고 감정기복이 커 우울과 상념이 치달을 땐 그냥 끝까지 파고 들어갔다. 끝을 알게 되니 평균이 생기고 스스로를 조정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멀리서 보면 나는 굉장히 평온해 보인다.
내 제일 강점은 인내심인데 친한 동생들에게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내 답은 항상 '그냥 하는 거야'였다. 힘들어도 목적이 생기면 그냥 꾸준히 했다. 한 해 한 해 지나 갈수록 속에서 자꾸 화가 올라와서 모든 억지에는 부작용이 있다고 생각해 꼼수를 부려본다. '그냥 숨 쉬듯이 생각 없이 가볍게 하자.'이다. '그냥 하는 거야'에서 살짝 산뜻한 느낌으로 속이는 형용사만 추가되었다. 이게 안 바뀌는 천성인가 보다. 안하진 않는다. 어떻게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겠는가.
내 야망과 야심에 크게 데어서 그냥 슴슴하게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이 억지도 생각의 전환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나는 학창 시절 평소 공부는 안 하지만 시험 성적은 중간 이상은 받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벼락치기를 해야 하는데 벼락치기를 잘할 수 있는 머리도 아니다. 단순 암기를 정말 못한다. 어느 정도 이상의 공부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쉴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 국어 공부를 간신히 마치면 속으로 '자! 이제 사회공부를 하며 쉬어볼까?' 하는 것이다.
지금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몇 개월동안 꾸준히 들었지만 '오스트리아에 가면 시간이 많을 테니 그때 시작해야지'하고 미루고 미루다 남자친구의 출근에 맞춰 전업 작가가 된 듯한 코스프레를 하며 안경을 쓰고 커피를 마시며 그냥 꾸준히 매일 썼다. 첫 시작이니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있었고 또 여행을 할 때라 이벤트도 많고 이것저것 소재가 좀 있었다. 처음만 해도 발행을 하고 세이브가 4개씩 있었다. 이탈리아에 넘어와서 아직 일주일이 안되었지만 워낙 소녀 같은 설렘 없는 염세적 유학이다 보니 아직 밀라노 시내도 한번 안 나갔다.(웃음) 글에 들어가는 모든 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이기 때문에 글에 사진을 넣기 위해 밀라노 두오모라도 한번 다녀와야 할 듯싶다.
꼴랑 한 달 정도 배어있는 이 작은 습관이 창작의 막막함을 뚫어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모닝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면 이탈리아에 와서는 모든 일들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뒤 뒷정리까지 하고 글을 쓴다.(부지런해 보이지만 오전에 연습을 안 하면 오후 이후에 연습실에 자리가 없고, 기숙사에서는 밥을 해 먹고 곧바로 설거지를 하는 게 규칙이다.)
아침부터 오늘은 뭘 쓰지? 제목은 어떻게 해야 센스 있어 보일까?를 한참 고민하지만 딱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다가 습관처럼 테이블에 앉아 타이핑을 치기 시작하면 마음의 소리가 술술 나온다. 학교에 다니기 전까지는 이 행위 자체가 내 외로움을 상쇄시켜 줄 수 있는 좋은 친구이기 때문에 시간과 정성을 다하고 허락한다면 내 습관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또 다른 내 노래인 내 글이 예쁨도 받기를 바라본다.
아프지 않으면 조깅을 꼭 하는데 내 새로운 산책 코스를 오늘 찾았다. 왼쪽 옆 쪽으로 작은 시내가 흐른다. 새로운 습관이 될 오늘의 글을 쓰는 모습_자판을 치면 딱딱 소리가 나서 카타르 항공에서 받은 새 양말을 깔고 타이핑을 친다. 너무 질이 안 좋아 양말로 신을 수 없었는데 새 용도를 찾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