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음을 알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엄마는 그 강산의 변화를 딱 여섯 번 넘긴 세월을 머금고 계신다. 한 달에 한 번은 머리에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저렴한 동네 미용실을 찾아다니신다. 그 돈마저 아까울 땐 혼자 구석구석 쌓인 눈을 치우느라 거울 앞에서 한참을 씨름하신다.
얼굴에는 세월이 휘두르는 날에 베여 크고 작은 주름들이 곳곳에 보인다. 미간에 깊이 파인 주름 몇 가닥은 내가 그어놓은 거 같아 미안해지기도 한다. 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아보자고 하여도 훈장처럼 생각하시는지 가지 않으시겠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세월의 흔적들은 다른 사람이라도 알아주니 괜찮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은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시커멓게 타들어가다 재만 남았을까? 아니다. 고통과 상처들로 마음에 굳은살이 박여 웬만한 상처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이 딱딱해졌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당직 근무를 하면서 ‘남극의 눈물’을 다시 보았다. 황제펭귄은 남극의 혹한에 정면 대결하여 생명을 탄생시킨다. 알을 놓치기라도 하면 필사적으로 빠르게 품어야 한다. 영하 50도의 바닥에 그대로 얼어버리기 때문이다. 두 달간 품은 새끼가 태어나면 위벽에 보관해놓은 펭귄 밀크를 먹인다.
그 모습이 엄마와 닮아 보였다. 자식이 엄마가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는 집을 떠나 직장 생활에서 이런저런 힘든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 속이 든든해야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아침 일찍 출근하는 자식보다 먼저 일어나 따뜻한 밥을 챙겨주신다. 엄마의 밥에 걱정과 응원의 맛이 난다.
대학생 시절에는 자취생활을 하였다. 요리에 소질은 없었지만 매번 사 먹을 수 없었기에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된장찌개를 끓여보았다. 밋밋하고, 깊이가 없었다. 흉내만 냈을 뿐이었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엄마처럼 깊은 맛이 나지 않을까?”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셨다. 엄마의 손맛을 단숨에 따라 할 수 있겠냐며...
나는 이 말이 ‘네가 벌써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느냐’라고도 들리기도 하였다. 여자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워야 했다. 그 막막함 속에서 ‘엄마’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기지 않았으면 나오지 못할 힘으로 자식들을 키워냈다. 엄마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라지만, 힘든 시간 속에 서로가 남긴 자신의 상처를 먼저 봐달라고 다툴 뿐이었다. 엄마의 마음을 나는 아는 척할 뿐이다.
내가 엄마가 되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다. 그저 언젠가 엄마 마음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소금물을 쏟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