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민 HEYMIN Sep 29. 2020

공공기관 디자이너가 되고 싶나요?

장점 다섯가지 + 단점 다섯가지


이 글을 쓰는 이유?


 작년 4월. 스물아홉의 나는 이 곳에 중고신입으로 입사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난 지금... 어느덧 서른의 반이 지났고 낯설기만 했던 이 곳의 분위기와 질서가 이젠 내 몸에서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완전한 이 곳의 사람이 되기 전에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느끼고 배운 것들을 브런치에서 남겨두기로 했다.

 어떤 회사인지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 나는 어느 기관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만약 사기업에서 공기업으로 눈을 돌렸거나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고민인 분들이 있다면, 이 글이 그 신중한 결정에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래본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해석들이니까 이 글을 읽고 모든 공공기관이 그렇다는 오류나 편견은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점 다섯가지



1. 다양한 활동과 자격증을 인정받을 수 있다.

 디자이너에게는 '실력'이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이다. 그런데 디자이너의 직장을 단순히 두 부류로 나누어 사기업과 공기업으로 보면 '실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서로 굉장히 다르다.

 보통 에이전시나 스타트업과 같은 사기업은 '자격증'이 크게 의미가 없다. 당연히 노력의 증거로는 보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스타일이 잔뜩 묻어나는 '포트폴리오'가 지원자의 가장 강력한 총알이다!

 하지만 공기업을 포함해 공공기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격증은 곧 '실력'이다. 그래서 입사할 때도 이력서나 자소서에 쓸 자격증과 활동들이 많다면 더욱 유리하다. 나도 그 덕을 많이 본 케이스다.  이전 회사를 다니면서 투잡으로 했던 외주작업, 공모전, 교육수강 등 틈날 때 이룬 것들이 서류전형과 면접에서 빛을 보았다.



2. 고도의 디자인 스킬은 요구하지 않는다.

 에이전시에서는 보통 소속된 디자이너에게 트렌디하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기대한다. 그리고 디자이너 본인도 스스로 그런 디자인을 실현했을 때 큰 보람과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여긴 조금 다르다. 어느 정도의 디자인 감각과 빠른 손이 있다면 큰 무리 없이 시안을 통과받을 수 있다. 예쁜 것보다 빠른 게 더 통한다. 회사 예산으로 디자인 사이트 라이센스를 결제해두기 때문에 그때그때 맞는 소스들을 빨리빨리 골라내고 조합하는 센스와 스킬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창조하는 능력보다 응용하는 능력이 더 필요한 곳이다.

 그리고 작업물에 대해 넘치는 피드백을 주거나 작은 디테일까지 터치하는 사람이 적다.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과장님이나 부장님은 시각적인 결과물에 그렇게 예민한 분들이 아니다. 대신 그들을 만족시키려면 한눈에 잘 읽히도록 만들고 주어진 시간 내에 마무리해서 보고를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굳이 우선순위를 따지면 퀄리티보다는 메세지 전달, 진행 속도 등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3. 고용불안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이 확실히 줄어든다. 

 그렇다. 여긴 철밥통이다.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은 큰 잘못을 한다거나 내 손으로 사직서를 던지지 않는 한, 정년이 보장된다. 조금만 쉬어도 트렌드에 뒤쳐지거나 감을 잃을 수 있는 디자이너에게 이런 안정적인 자리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나도 그 매력 때문에 사기업에서 공기업으로 눈을 돌렸다.

 이 곳에 오기 전, 스타트업에서 근무할 때는 통장에 다달이 찍히는 금액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여러 번 달랬다. 하루빨리 백마 탄 투자자가 나타나 내 밥줄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주길 바랬다.

 하지만 여긴 입사와 동시에 평생밥줄을 손에 쥐었다. 굳이 대표와 연봉협상을 하지 않아도 해마다 오르는 호봉제가 있고, 연말이면 통장에 찍히는 성과급. 그리고 자격증이 있으면 매달 플러스되는 기술수당 등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아졌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기록하는 다섯가지 장점 중 이게 가장 현실적으로 와 닿은 부분이다.



4. 관리자의 시선과 마인드를 경험할 수 있다.

 이 곳에선 주로 내가 디자인을 하기도 하지만 큰 프로젝트는 외부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있다. 그럼 맨날 피드백 받기만 하던 내가 누군가의 디자인을 평가하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덕분에 스케줄과 인력을 조율하는 관리자 마인드를 배울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계약관계에서 오고 가는 대화 예의, 정중하게 부탁하고 거절하는 방법 등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몸에 익는 커뮤니케이션 스킬들이 생긴다.



5. 문서작성 스킬이 크게 향상된다.  

 여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종이로 이루어진다. 이런 일을 할 거라고 계획보고를 올려야 하고, 일이 끝나면 다 했다고 완료보고도 올려야 한다. 그래서 말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는 작업도 굳이 텍스트로 길게 풀어써서 위에 보고를 해야 한다. 특히 맞춤법도 신경 써야 하고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를 써야 하니 사용하는 어휘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작문실력과 문서작성 스킬이 올라간다. 디자이너로서 이런 스킬을 가지게 되는 건 큰 장점이지 않을까.





단점 다섯가지



1. 1인 디자이너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외롭다.

 여긴 디자인팀이 따로 없다. 내가 소속된 부서는 '전산팀'이다. 그래서 사실 내가 하는 일을 10으로 놓고 보면 디자인은 3이나 4에 가깝다. 나머지는 전산업무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난 가끔 일을 할 때 외로움을 느끼거나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이 곳에 디자이너로 들어왔는지 아니면 전산일을 하러 왔는지 하루에도 여러 번 헷갈리지만... 위에 적은 다섯가지 장점들 때문에 쉽게 떠날 수 없는 자리이다.

 전 직장에선 개발자나 기획자가 모두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시안 A,B를 놓고 무엇이 나은지 토론을 하는 그 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런 재미를 기대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래서 혼자 하는 작업이 맞지 않거나 결정장애가 있다면 이런 기관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마음은 비우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2. 트렌드를 쫓아갈 기회와 시간이 부족하다.

 이건 보기에 따라 변명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근데 진짜 부족하다. 이전 직장에서는 근무 중에 레퍼런스를 찾거나 습작을 하거나 디자인 툴과 관련된 동영상 강의를 보는 일도 업무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아, 한 가지 좋은 점은 교육비가 지원된다. 괜찮은 디자인 교육이 있으면 듣고 싶다고 보고를 올리면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진짜 듣고 싶은 교육보다는 내 위치와 직무에 어울리는 교육을 들고 가야 허락을 받을 수 있다. (이건 기관의 분위기에 따라 다를 듯!)



3. 정형화된 스타일 안에 갇힐 수 있다.

 처음 이 곳의 채용공고를 보았던 게 기억난다. NCS 기준 필요한 직무능력이 쭉 나열되어 있는데... 분명 '창의력'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취업을 하고 나면 창의력이 꼭 필요한가 싶어 진다. 나랏일이나 공적인 일을 담당하다 보니 대부분 '신뢰와 청렴'을 상징하는 초록색과 파란색을 즐겨 쓰고, 어르신들까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해야하기 때문에 직관적이고 정형화된 스타일로 흘러가게 된다. 그래서 만약 본인이 개성 있는 디자인을 추구해왔다면 어느 정도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게 꼭 나쁜 건 아니다. 다만 개성과 아이덴티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크다면 그 욕심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게 포인트다!



4. 예스맨이 될 준비가 필요하다.

 이곳은 나의 세 번째 직장이다. 그전에 다닌 대기업, 스타트업에서는 'NO'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내가 'NO'라고 외칠 때 필요한 용기도 10 중에 2 정도만 있으면 됐다. 그런데 여기는 8까지 필요하다. 실제로 나는 이 곳에서 '넹, 넵, 네네'를 번갈아 쓰는 예스맨으로 지내고 있다. 그러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디자이너로서 성장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회사는 회사다라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고, 퇴근시간 이후나 개인적인 시간을 활용해서 디자이너로서의 발전에 집중하고 있다.



5. 회사랑 내꺼. 둘 다 지키는 건 엄청난 노력이 따른다.

 회사에서 하는 디자인 말고, 본인의 스타일을 지키기 위해 다른 디자인 작업도 하고 싶다면 장기적인 플랜을 세워 꾸준히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거나 아니면 스터디 같은 그룹에 소속되어 노력이 루틴이 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단순히 '하고 싶은 일'로 남게 하지 말고 '해야 할 일'처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개인 작업물을 올리거나 공부한 걸 남길 수 있도록 SNS나 다른 플랫폼에 꾸준히 업로드하고 노출하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간단하게 만들어서 작업물과 이력을 올려두었다. 직접 제작한 건 아니고 무료 템플릿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시간도 많이 아끼고 기본 템플릿 퀄리티도 좋아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공공기관이 아무리 안정적이라지만 디자이너로서의 갈증을 백 프로 해소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곳이 평생직장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이대로 안주하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디자이너로서의 수명을 이어가고 싶다면 회사 밖에서의 노력도 당연히 따라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신이 기억해야 하는 건?


 결론은 이렇다.


 본인의 디자인 결과물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 디자이너라면 들어올 생각을 말자! 100중에 100을 다 채워야 마우스를 떼는 디자이너라면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은 추천하지 않는다.

 1px의 디테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에이전시를 가거나 자신의 브랜드를 만드는 게 정신건강에 더 이로울 것이다.


 그리고 '사용자와 더 가까운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면 신중하게 고민해보자!

 예전에는 누가 내게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으면 바로 'UX/UI 디자이너 혹은 경험 디자이너'라고 당당하게 소개했지만 이 곳에 들어온 후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내가 디자인하는 게 사용자의 경험보다는 기관의 입맛에 더 가까워졌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사용성을 아주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유저의 적극적인 구매활동을 위해 구글 어낼리틱스를 본다거나 버튼의 위치를 고민하는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가진 않는다. 그래서 사용자로부터 멀어진 건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고 개인적으로 정말정말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사실 이 글은 오랜 시간 여러 번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마무리한 글이다. 나름 꽤 솔직하게 많은 이야기를 적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혹시 우리 회사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싶다.

 이제 앞에 쭉 늘어놓은 다섯가지 장점과 단점을 놓고 스스로 저울질해보면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의 디자이너가 본인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답이 내려질 것이다.

 이 글 외에 내가 더 줄 수 있는 도움은... 퇴사 후에 보낸 취준 기간 후기나 이력서, 자소서, 면접을 위한 개인적인 팁 정도가 될 거 같다. 디자이너로서 공기업, 공공기관 취업을 준비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돌아다니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그 답답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고민이 너무 깊거나 대화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편하게 물어봐도 좋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이건 다음에 또 글이 쓰고 싶은 날... 몇 번 다듬어 적은 뒤에 올릴 생각이다. 그럼 오늘도 다들 꿈에 가까워지는 하루였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그 꿈이 작은 꿈이든 큰 꿈이든 아무튼 가까워졌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