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공공기관 디자이너가 되고 싶나요?라는 글을 이곳에 남겨두었는데 이렇게 가까운 시기에 퇴사를 결정할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돌아보면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것이 모이고 모여 제 뿌리를 잡아주는 귀한 거름이 되어주더군요. 이번에도 참 어렵게 결정했지만 이 선택과 지난 2년의 경험이 다시 한번 귀한 거름이 되어주길 기대해봅니다. 이제 조금 더 자유로운 디자이너의 일상으로 돌아와 제 마음을 끌어당기는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인생에 있어 다음 스텝이 되어줄만한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려 합니다. 여튼.
오랜만에 메모장을 들여다보다 지난 6월에 적어둔 일기를 읽었습니다. 퇴사 후의 마음을 기록한 글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남겨두고 싶어 이렇게 브런치에 옮겨 적어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노들섬을 꽤 찾았습니다. 드라마 '스타트업'을 흥미롭게 보고나서 촬영지가 그곳이라는 말에 언제 한번 가야지 마음만 먹다가 드디어 찾았네요. 노들서가 1층에 들어서면 한 벽이 모두 유리창으로 된 곳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책을 읽거나 일을 할 수 있는 아늑한 자리가 여럿 있는데 비가 오는 날이든 해가 쨍한 날이든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가득 채워주는 곳으로는 정말 그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유리면을 제외한 다른 벽에는 누군가의 흔적이 느껴지는 여러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있습니다. 노들섬에 다녀간 직장인, 학생, 취준생, 알바생, 주부 그 외 이름 말고 어떤 '일'로서 정의되어 살아가는 많은 분들의 짧은 푸념 혹은 인생사들이 저마다의 글씨체로 녹아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노들서가에서 여기저기 비치해둔 종이들 덕분입니다. 종이에 글을 적고 풀칠을 한 뒤 찍혀있는 점선대로 접어 붙이면 한 권의 책이 됩니다. 제목도 직접 적을 수 있죠. 완성이 되면 원하는 책장 괜찮은 곳에 꽂아두면 됩니다.
한 자리에 서거나 앉아서 책장을 바라봅니다. 뭔가 눈에 드는 책 서너권을 빼서 읽다보면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쉼이 되거나, 허기진 마음을 달래고 미소짓게 하는 고요한 대화가 되어줍니다. 어쩌다 이 글에 닿은 분들도 그 고요한 쉼과 대화의 맛을 꼭 느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6월에 적었던 저의 퇴사 후 첫 일기이자 상반기 회고를 남겨두고 갑니다. 매번 꿈에 가까워지는 하루였기를 바란다며 글을 마무리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좀 다르게 적을게요. 오늘은 '여유'에 더 가까워지는 하루였기를! 곧 새로운 글로 올게요 :)
6월 3일 목요일
여기는 노들섬.
오후 4시를 조금 넘은 시간.
목요일 이 시간에 나는 이곳에 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오늘이 몇 월 몇 일, 어느 요일인지 항상 예민해야만 했다. 결재문서에 어쩌다 21년이 아니라 20년이라고 적을 때면 1이 작아진 숫자 대신 되려 과장님 잔소리는 1이 늘었다. 그 때마다 숫자 하나도 챙기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들다가, 이내 숫자 하나 때문에 한 소리 듣는 게 억울해 속상함이 쫓아왔다. 그리고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업무일지를 적었다. 그 때마다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뜨는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는데, 그러니 오늘이 몇 월 몇 일인지 절대 모르고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나니 21이 20이 되는 건 그냥 지우고 다시 쓰면 되는, 내 일기장에서나 벌어지는 가벼운 일이 되었다.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사라지니 요일 세는 일도 거의 없다. 일요일이 월요일 같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이기도 하다. 방금 전에도 휴대폰을 깨워 오늘이 유월 언제인지, 무슨 요일인지 확인했다. 문득 6이라는 숫자가 낯설다. 매년 그렇듯, 일년을 상반기 하반기 두쪽으로 쪼개는 6월을 맞이하니 지나간 반쪽의 다섯 달이 떠올랐다.
몇 가지 장면이 스친다.
올해 첫 날 1월1일. 병원에서 먹었던 아침상. 오랜만에 보는 은빛 급식판이었는데 하얀 쌀밥과 된장국, 정갈한 몇 가지 찬이 참 가지런했다. 맛은 그리 있지도 없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평범한 맛이었지만 그 아침상은 ‘아침에 차려진 상’ 이상의 것이었다. 하필이면 12월31일 수술을 하게 된 나 때문에 1월1일 빨간 날에도 출근해야했던 아주머니의 수고로움으로 간이 된, 지나치게 감사한 상이었다.
그리고 4월 언제더라. 퇴사하기 전 찾아간 회사 옥상뷰가 떠올랐다. 어떤 분 말로는 그 옥상이 여의도 불꽃축제가 한창일 때 굳이 수많은 인파 속에 들지 않아도 불꽃 번지는 밤하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불꽃놀이를 보지 못한 채, 맑게 갠 대낮의 여의도뷰를 마지막으로 회사를 나왔다. 불꽃놀이 명당에 서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저 반짝이는 불꽃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퇴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한창 볕이 좋던 5월의 어느 날. 산에서 맞은 소나기가 떠올랐다. 퇴사 후에 어딜 가야 먼지조각 부유하는 마음을 투명하게 개워낼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이름부터 풀냄새 풍기는 ‘청송’을 택했다. 하루는 폭포가 유명하다는 주왕산을 찾았는데 부침개와 산채비빔밥으로 배를 채우고 30분 정도 올랐을까 갑자기 후두두두 소나기가 내렸다. 비를 피해 이미 지나온 쪽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꽤 돌아와서야 마주한 화장실. 건물 입구에 좁게 뻗은 처마 아래 어린아이처럼 가방을 안고 쪼그려 앉았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까 그냥 내려갈까, 해가 드는 거 같은데 금새 그치지 않을까? 여기까지 왔는데 폭포 못 보는 건 아쉽잖아. 오, 이제 덜 오는 거 같다!
시간이 흐르고 비는 점점 잦아들었다. 아까나 지금이나 우산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잦아든 비를 보니 이제는 맞아도 될 것처럼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온 길을 다시 걸었다. 폭포가 꼭 보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나타났다. 투명한 물줄기와 계곡물을 보니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우와, 이걸 못 봤으면 이렇게 좋을거라고 상상도 못했겠지?
참 다행이었다. 비가 걱정되어 바로 내려갔다면 폭포는 그저 멈춰있는 폭포였을 것이다. 소나기 때문에 포기한 폭포 사진에 머물렀을테니까. 지나고보니 마냥 야속했던 비가, 잠깐 오는 소나기였다는게 되려 고마워졌다.
앞으로도 소나기 같은 일은 더 있을테고 그럼 또 서너살 아이처럼 쪼그려 앉아 시무룩하기도 할테지만 그래도 이제는 별 거 아닌 듯 다시 일어나 나아가지 않을까.
이 글은 노들서가의 책장에 꽂혀있던 ‘글쓰기가 있는 삶’이라는 책 덕분에 쓰여진 글이다. ‘베테랑’이라는 필명을 적어두신 그 분도 브런치에 글을 적고 있다고 했다. 혹시나 브런치 필명도 같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검색해봤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작가는 없었다. 어쩌다 이 글을 보신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 글 덕에 나도 글을 쓰고 싶었다고. 어쩌면 당신은 생각보다 더 글을 잘 짓는, 좋은 글솜씨를 타고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계속 글을 써달라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