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생존과, 분투

이주 | <생츄어리>(왕민철, 2022)

by 성혜미

본래 살던 공간에서 낯선 공간으로 이동하는 데 수많은 까닭이 존재하겠지만 대개 어떤 필요에 의해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처를 옮긴다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테다. <생츄어리>의 동물들, 아니 그들이 대표하는 회귀 불능 야생동물은 후자에 가깝다. 대한민국의 야생동물구조센터는 해마다 1만5천여 마리의 동물을 구조한다. 그중 35퍼센트는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반면, 65퍼센트는 안락사된다. 안락사시키는 대상은 부상이 심하거나 사람을 좋아하는 동물들이다. 그들을 기존에 살던 야생으로 방생했을 때,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 않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이렇듯 구조된 야생동물들은 스스로 어디로 회귀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대신 인간에 의해 세 가지로 분류된다. 보호 아래 살거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회귀 불능 야생동물을 지금보다 더 많이 살리고 보호하기 위해 생츄어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며 출발한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생츄어리를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다고 말하진 않는 듯하다. <생츄어리>가 따라가는 인물은 크게 세 명, 곰보금자리프로젝트 활동가이자 수의사인 최태규와 청주동물원 김정호 수의사, 그리고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오예은 수의사다. 세 사람은 생츄어리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조성 시기를 비롯한 여러 여건에 관해서는 입장을 달리한다. 최태규는 지체하지 않고 사육곰 생츄어리를 만들기 위해 칠전팔기한다. 김정호는 동물원 환경 개선과 생츄어리 조성이 함께 이뤄져야 하며, 후자가 전자를 앞설 순 없다고 생각한다. 오예은을 비롯한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직원들은 수리부엉이의 안락사를 앞두고 생츄어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관점이 다른 만큼 세 사람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 역시 상이하다. 특히 그들의 내밀한 속사정을 토로할 때 그러하다. 윤리위 설립준비회의에 참여하는 최태규는 벽의 한 면이 모두 동물 그림으로 채워진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그 모습은 마치 동물원에 고립된 동물과도 같아서 그가 모든 동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물들을 관리하는 개개인을 비롯해 참새를 잡기 위해 쥐 끈끈이를 놓는 사람들의 인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논하기에 더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동물들이 고통받을 것이라 예상된다면 안락사를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정말 동물을 위한 일일까. 뒷모습을 보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최태규와 달리 김정호는 그의 인터뷰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동물에게 최대한 감정 이입하지 않고 의학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는 얘기에 앞선 대화들이 변명처럼 다가온다. 그렇지만 꼭 변명이기만 할까. 변명처럼 포장된 들어달라는 호소가 아닐까. 두 사람의 알력에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엿본다. 늘 그랬듯 부재한 동물, 야생으로 회귀할 수 없는 동물들이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정할 수 없는 한 계속해서 따라붙는 이 무엇한 감각.


오예은의 말을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그의 속내는 내레이션으로 삽입된다. 그러는 동안 카메라는 고라니의 안락사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은 최대한 배제되고 동물만을 따라간다. 그 모습은 왜인지 고요하다. 소리라곤 일상의 소음뿐인 화면에서 오예은의 목소리만 떠돈다. 그는 동물을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앞세운다. 수의사의 입장에선 뛰는 심장소리를 듣고, 안락사 약을 주사하고, 멈추는 심장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유쾌하지 않으며 속이 메스꺼울 때도 있다는 것이다. 동물들의 통증도 중요하지만 더 치료하면 상태가 호전되지 않을까 자문한다. 동물을 담아내는 화면에 덧붙은 사람의 목소리, 우리는 인간이 동물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의식하게 된다. 오예은의 솔직한 감상 앞에서 겸손해 지는 이유다. 구조한 동물을 치료하고 안락사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직원들이 보호하던 동물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을 보여준다. 너구리, 고라니, 독수리가 케이지를 떠나 본래 살던 곳과 같은 환경을 찾아간다. 이어서 밭과 숲을 뛰어다니는 고라니들, 새들의 군무, 쓰레기장의 까마귀, 수로 안의 고라니가 병치된다.


최근 전라남도 나주시의 한 아파트에서 1천여 마리가 넘는 백로 떼의 악취로 인해 주민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백로 서식지였던 곳이다. 해당 에피소드와 <생츄어리>를 나란히 두고 보면 인간이란 퍽 모순적이다. 야생동물이 거주할 공간을 없앤 것도 인간이지만, 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씨름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동물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곤 ‘죽음’과 ‘생존’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고통을 붙잡고도 살아남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이는 인간의 분투다. 영화는 동물답게 ‘살 곳’의 필요를 절감하며 인간과 동물 각자의 노력이 시작되길 바란다. 그곳이 생츄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