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낭만을 해체하기

광장 | <한국이 싫어서>(장건재, 2024)

by 성혜미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떠난 기차 여행, 목적지에 도착해 기차역 밖으로 몇십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는데 역 광장은 온데간데없고 두 명이 겨우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보도가 전부라면 어떨까. 어떤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과 이리저리 뒤엉킨 채로 눈살을 찌푸리고 답답해하며 찻길에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쓸 테다. 같은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밀려 나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분산시킬 만한 공간을 상실하는 일은 가야 할 방향을 흐릿하게 만든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도 그렇다. 홍익대학교 입학 후 소정의 과정을 거쳐 졸업한 계나는 학자금대출을 갚기 위해 적당한 곳에 취직했다. 어딘가 익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일련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대다수가 경험했을 모습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게다가 개인의 취향은 여전히 은근하고 조용하게 무시된다. 점심을 먹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직원은 4명이지만 메뉴는 과장이 고른 동태탕으로 통일되는 것처럼 말이다. 메뉴를 고르던 계나는 황당하다. 퇴근 후 도착한 집에서도 계나의 사정은 비슷하다. 계나의 엄마는 새로 이사할 아파트에 자금을 보태고 연인인 지명과 결혼하라며 계나를 압박한다.


한국 생활에 지친 계나는 결국 뉴질랜드로 떠난다. 계나의 주변 사람들은 묻는다. “외국 나가면 나아질 것 같아?” 물음을 바꿔보겠다. 뉴질랜드라고 한국과 크게 다를까? 당연한 말이지만 날씨가 다르다. 뉴질랜드는 따뜻하고 한국은 춥다. 그렇지만 뉴질랜드 날씨는 한국의 추위보다는 동화책 『추위를 싫어한 펭귄』에 등장하는 무더운 섬에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추운 남극에서 잘 살아가는 다른 펭귄들과 달리 추위를 싫어하는 파블로는 무더운 섬으로 떠난다. 나고 자란 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계나와 파블로는 닮았다. 파블로가 무더운 섬에서 잘 지내는 걸 본 계나는 한국보다 더운 나라를 이상향으로 설정한 것이다. 말하자면 두 나라 사이에 의미를 발생시킨 것은 파블로인 셈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통상근로자로, 뉴질랜드에서는 파트타임 잡으로 생계를 해결한다는 점도 다르다. 하지만 파트타임 잡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일은 한국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다만 계나가 파트타임 잡으로 일을 하면서도 ‘즐거워 보이는’ 까닭은 영화가 두 공간을 상이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사람도 카메라도 대체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인물이라고는 유일하게 계나뿐이다. 이 경우에도 카메라는 멈춰있다. 게다가 거리의 풍경도 변하지 않는다. 한국의 면면을 다양하게 보여줄 생각이 없는 영화로 인해 우리도 비슷한 프레임들 안에서만 머무른다. 그랬던 카메라가 뉴질랜드에서는 인물과 함께 이동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클랜드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길과 오클랜드 시내, 하준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계나와 함께 누빈다. 생경한 공간을 눈으로 함께 좇는다. 영화는 계나를 파노라마로 펼쳐 놓음으로써 그가 다양한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출신도 다르고 뉴질랜드로 떠나온 까닭도 제각각이다. 계속해서 옆으로 제 파이를 넓히며 배경으로 시선을 앗아가던 카메라는 기어코 계나를 달라지게 만든다. 외국까지 가서 나이와 학력을 따지고 간단한 영어도 제대로 못 알아듣던 계나가 친구들과 정치 얘기를 주고받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는 뉴질랜드가 한국보다 더 낫다고 단언하기를 주저한다. 계나의 과거(한국)는 ‘소리’로써 계나의 현재(뉴질랜드)를 침범한다. 한 외국인이 공원에서 와인을 마시는 계나와 재인을 향해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불법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본인들은 성인이기 때문에 술을 마셔도 괜찮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외국인은 여기 오기 전에 영어나 제대로 배우라고 화를 내는데, 그런 남자의 모습 위로 알겠다고 말하는 계나의 잠꼬대가 보이스 오버된다. 잠시 후 한국 집에서 잠꼬대하며 자고 있는 계나의 모습이 나타난다. 두 장면은 전혀 관련이 없지만 나란히 병치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화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방식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뉴질랜드 국수 가게에서 파트타임 잡으로 일하다가 만난 형서와 키스한 후 잔디에 누워 스카이 타워를 바라보는 계나의 모습과 장면이 끝나기도 전에 대뜸 행복하냐고 묻는 목소리의 삽입. 이어지는 장면에는 호프집에서 행복전도사가 출연하는 방송프로그램을 보며 대화하는 계나와 경윤이 등장한다. 계나는 행복한가? 호기롭게 떠나온 뉴질랜드에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과거의 한국이 계속해서 자리를 비집고 들어서는 걸 보면 영화는 아직 아니라고 답하는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딱 한 번 뉴질랜드를 침범하지 않는 한국의 장면이 있다. 게다가 그렇게 등장한 한국의 시간은 뉴질랜드의 그것보다 후행한다. 바로 오클랜드 일가족 사망사건 뉴스 보도에서 경윤의 영정사진으로 넘어올 때다. 뉴질랜드의 장면 범위를 조금 더 넓혀보자면 그곳에서는 온갖 죽음이 계나 곁을 맴돈다. 재인의 생일파티에서 앨리는 불안을 감수하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며 옥상에 올라 낙하산을 착용한다. 잘못되면 어떡하냐고 묻는 계나에게 “안 죽어! 그리고 죽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뛰어내린다. 앨리의 말은 곱씹을수록 입안에 남는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누군가 연달아 죽기 때문일까. 계나는 뉴스를 통해 폐암 말기 투병 중이었던 행복전도사가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몇 장면을 건너뛰면 오클랜드에 살던 40대 남성과 여성, 어린아이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다. 우리는 곧장 하준의 아빠를 떠올린다. 그는 계나와 하준이 듣지 못한 소리를 듣고 느끼지 않은 진동을 느끼며 연신 불안해한다. 밤에 할 게 없어 답답하다며 심하게 다리를 떨기도 하고, 식사할 때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 멍하니 천장의 조명을 바라보던 그는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됐어도 뉴질랜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을 그리워하는 듯한 인물이다. 때문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정사진이 나온다면 응당 그의 것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진 속 얼굴은 경윤이다. 경윤의 죽음은 툭, 하고 아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다. 두 공간을 이미지와 소리, 둘 중 그 어느 것으로도 맞물리지 않는 영화의 태도는 이전과 너무도 다른지라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게 영화는 강변한다. 한국과 뉴질랜드를 오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계나가 서 있는 곳 그 자체가 변할 차례라고.


계나는 더 이상 행복을 운운하지 않는다. 행복은 한낱 허상에 불과한 것처럼 꿈속에서만 말해진다. 뉴질랜드행을 택한 이후로 무엇인가 바뀌었을 거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행복을 말하던 사람들은 계나의 엄마를 제외하고 모두 자취를 감췄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는 게 행복이라던 계나의 엄마. 그런 엄마의 바람은 동시에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이었다. 이 흐름을 발견하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무력감,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공동체로부터의 분리, 아직도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감각으로의 재진입. 턱 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 그런데도 계나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떠나기를 선택한다. 다만 그곳이 뉴질랜드는 아닌 듯하다. 이미 보도에서 찻길로 떨어져 봤던 계나는 어디로, 무엇을 위해 떠나는 걸까.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곤 몸과 마음이 배고프고 춥지 않은 곳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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