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 <키메라>(알리체 로르와커, 2024)
이탈리아(국가) 불법 도굴꾼 무리를 모티프로 한 톰바롤리는 노래 몇 소절로 ‘아르투’라는 인물을 단숨에 설명한다. 아일랜드인지 영국인지 바깥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온 이방인이자, 고고학을 열렬히 사랑하지만 도굴꾼이 된 가난뱅이, 경계에 선 인물이 바로 아르투다. 아르투처럼 두 세계를 오가는 인물은 대게 여러 세계를 오가며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등장하기 쉬운데 <키메라>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그는 이탈리아에 임시로 머물며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외국인이자, 톰바롤리에 속하지만 그들만큼 도굴 생활에 목 매지도 않고 그것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도 삼지 않는 불완전한 도굴꾼이다. 게다가 유물을 찾아내면서도 그 가치를 결정하진 못한다. 옛 연인인 베냐미나의 집에서도 플로라에게 환대받지만 베냐미나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 그의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베냐미나가 있는 미지의 세계도 아르투의 현재와 단절돼 있어 그곳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못’하는 것 투성이인 그곳에서 <키메라>는 다만, 아주 미약하게, 하지만 과감하게, 과거를 억지로 붙들어 놓는 모든 시도들을 실패하게 만든다. 여신상의 머리를 심연으로 던지고 난 후 다시 시골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톰바롤리는 다시 노래를 부른다.
“만약 인간이 날아가는 새를 더 닮는다면, 눈부시게 빛나는 보물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행복과 신비 사이에서 더 조화로이 살아가겠네.”
그 기차에서 아르투는 영화가 시작할 때 만났던 사람들을 만난다. 달라진 건 그들은 이미 살아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 역무원을 포함한 기차의 승객들은 아르투에게 자신과 함께 묻힌 부장품들을 찾아달라고 말한다. 그 부장품들은 톰바롤리가 도굴하고 복원한 물건들이었다. 톰바롤리가 그들의 부장품을 가져감으로써 구해지지 못한 그들의 영혼은 지상도, 지하도, 현세도, 저승도 아닌 곳, 멈춰버린 기차에서 헤매게 된 것이다. 아르투는 그 기차에서 빠져나와 걷고 또 걷는다.
걷고 걸어 도착한 폐역에서 만나게 된 것은, 마치 “행복과 신비 사이에서 더 조화로이 살아”가는 듯한 여성과 아이들이 속한 공동체다. 여성들과 아이들은 이탈리아(인물)를 주축으로 리 파르벨라(RIPARRBELLA)에 모인다. 한쪽은 시골로 가는 방향, 다른쪽은 또 도시로 향하는 곳인 리 파르벨라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어느새 폐역이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공공의 건물” 즉 “모두의 것”이 되었다. 이들은 아르투처럼 사람과 사람을, 혹은 어떤 가치들을, 혹은 과거와 현재를 잇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어떤 것을 엮어내고 잇는 데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테다. 노래하고, 서로를 돌보고, 규칙을 정해 일상을 꾸려가는 공동의 리듬을 형성하여 과거와 현재를 구분짓거나 어느 한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저 시간을 지속한다.
인간이 날아가는 새를 닮는다면, 아르투가 그 새를 더 닮는다면.
날아다니는 새떼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불쑥불쑥 삽입된다. 영화 초반에 아르투는 새떼가 날아다니는 영화 밭에서, 또 부엉이가 내려다보고 있는 바로 그 아래서 땅을 파고 또 파고 이내 그 안으로 들어가 죽은 자들의 부장품을 훔쳐간다. 그 부장품들은 돈으로 환산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톰바롤리의 두 번째 노래가 불리고 나면 아르투는 땅 속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새를 의식한다. 결국 들어간 곳에선 입구가 막혀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곳에서 아르투는 줄곧 그리워하던 베냐미나를 만난다. 아르투는 노래와 새의 인도 아래 리 파르벨라 역을 거쳐 마침내 행복과 신비 사이에 도착한다. 무의미, 시간도 공간도 그 어느 구분도 의미없는 그곳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