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없는 도시, 불행은 다음을 기다린다

선과악 | <시티 오브 갓>(페르난도 메이렐레스,카티아 런드,2002)

by 성혜미

선악을 구별하는 일이 자의적이고 상대적이란 사실은 이제 너무도 자명하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언제 사건 혹은 인물을 마주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인물이 놓인 시공간에 따라 그가 선악을 가늠하는 바는 달라진다는 말인데, 영화 <시티 오브 갓>은 그로부터 빗겨 서 있다. 브라질의 빈민가 중 하나인 ‘시티 오브 갓’의 아이들은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사람을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는다. 어디 하나 도덕적이라거나, 양심적이라거나, 발전적이라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연쇄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들을 부정할 바 없이 악인 그 자체라고 여기게 된다. 그렇지만 악이 전체에서 선을 덜어내고 남은 것이라고 했을 때, 시티 오브 갓은 덜어낼 선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던 곳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악이라고 규정하는 일 자체가 그들이 발 딛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나의 선에서 악을 덜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면 그들을 절대 악으로 규정했던 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브라질의 빈민가를 총칭하는 ‘파벨라’는 19세기 말 브라질 북부에서 발생한 카누도스 내란에 파견되었지만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강제 전역한 군인들이 산기슭에 판자촌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산업화와 함께 농촌에서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제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들이 총을 들고 서로를 죽이고 죽는다. 경찰이나 사법권이 닿을 수 없는 이곳에선 아이들이 질서를 만들어 간다. 폭력은 곧 소중한 가족이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곧 목적이나 놀이로 전락하는 것이다. 서로를 죽이는 놀이에 남는 것이라곤 몰락의 길 단 하나다.


‘범죄는 곧 몰락’이라고 단정 지었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건 시티 오브 갓에서 나고 자라 사진 기사가 된 ‘부스까페’다. 그는 배달원으로 아르바이트하던 신문사에 개인 필름의 현상을 맡겼다가 우연찮게 눈에 띄어 빼게노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뢰받게 된다. 마약을 하고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제대로 된 직장도 없던 부스까페가 내내 바라던 사진작가가 되는 그 첫걸음을 (그나마) 선한 인물의 성장이라고 바라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시티 오브 갓의 바깥은 신문사가 유일하다. 파벨라가 아닌 도시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 부스까페가 의뢰받아 찍는 사진도 시티 오브 갓 내부를 벗어나지 못한다. 시티 오브 갓 안에서 활개 치는 빼게노를 찍기 위해 그 안을 빙빙 돌 뿐이다. 부스까페는 끝내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낸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단념하게 되는 것은 빼게노는 죽었지만 그의 성정이 다른 이들에게 대물림된다는 데 있다. 일명 ‘똘마니들’. 똘마니들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질서를 어겼다는 이유로 당사자가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그의 친구를 죽이는 빼게노를 보며 분을 삼키다가 결국 빼게노를 총으로 쏴 죽인다. 특기할 만한 것은 시티 오브 갓의 인물들이 상대를 공격할 때 대개는 그 이유와 인과관계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마네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세노라의 무리에 합류해 빼게노를 겨누는 건 자신의 여자친구가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죽인 은행 직원의 아들은 결국 마네를 향해 총을 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처참한 현실은 돌고 돌아도 결국 제자리다. 불행은 끈질기게 그들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시티 오브 갓>을 보는 내내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은 서슴지 않고 서로를 겨누고 죽음을 구경하는 인물들의 모습 때문인지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채 빈곤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을 연민하지도, 숱한 범죄를 단순히 그들의 탓으로만 돌리지도 못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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