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시간>(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14)
우울증 치료 후 복직을 앞둔 산드라는 느닷없이 해고를 통보받는다. 회사 동료들이 그의 복직과 보너스를 두고 후자를 선택한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작업반장으로부터 압력이 있었다는 제보 덕분에 월요일 아침 재투표 기회를 얻는다. 동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은 단 이틀뿐, 마음을 바꿔 산드라를 지지하는 동료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쪽의 반발도 거세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서사적 요소를 어느 정도 포기한 채 파편화된 에피소드를 그대로 나열한다. 새로운 사건을 바라면서 영화를 좇아가던 우리는 일순간 기대를 접는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반복은 심심하다거나 지루하다는 감상이 아니다. 이 영화는 어떻게 이미지들이 연쇄되는가를 묻는 대신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가’를 묻는 작업이다. 따라서 산드라가 동료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 두 인물의 이미지는 병치되거나 나열된다. 카메라가 길 건너는 산드라를 따라가면 뒤이어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숏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장면을 나누지 않아 온전히 보존된 시간 안에는 산드라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것이 큰 갈등 기복이 존재하지 않아도 영화를 따라가는 이유이며, 덕분에 우리는 발생하는 우연들을 충분히 현실적이라고 받아들인다.
영화는 이 같은 반복에 차이를 더하며 진행된다. 차이는 단일한 공간 내 인물들의 단절과 연결을 통해 나타난다. 먼저 단절은 산드라와 동료 사이에 존재하는 벽으로 인해 발생한다. 투 숏으로 인물의 대화 장면을 보여줄 때, 영화는 이미지 자체로 그들 사이를 구분 짓는다. 동료와 산드라를 갈라놓는 기둥, 동료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산드라, 이본과 산드라 사이에 놓인 차 문, 줄리앙이 서 있는 곳의 벽돌과 판이한 산드라의 배경이 그렇다. 자신의 두려움과 막막함은 헤아리지 않고 동료들의 집으로 등만 떠미는 마누의 차를 탔을 때, 두 사람의 대화를 여러 컷으로 나눠 보여주는 장면 또한 해당한다. 이는 산드라를 이해하지만 그에게 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산드라의 범위 바깥으로 내몬 것과 같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동료들이 느끼는 양가감정을 그들의 잘못이나 책임으로 돌리지 않는다. 단순히 그렇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며 병치된 이미지들의 팽팽한 긴장에서 얻어지는 순간적인 깨달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심으로 산드라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무엇인가. 이때 이미지의 나열이 등장한다. 자신의 실수를 덮어준 산드라에게 미안하다며 우는 티무르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산드라를 번갈아 보여주는 장면,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안느가 산드라와 함께 차 안에서 음악을 번갈아 부르는 장면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산드라와 마주 보는 대상의 경계가 순간적으로 해체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주체와 대상 모두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교감을 나누게 되는 순간에 바로 아우라적 경험이 탄생한다.
산드라는 마침내 깨어나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남은 셋은 저녁에 봐야지”라며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장면의 전후 관계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느의 남편에게 폭언을 들은 후 산드라는 집에 도착해 안정제 한 통을 모두 먹는다. 그때 안느가 집에 찾아온다. 망설임 끝에 방문을 열고 나간 산드라는 계단에 서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때 카메라는 산드라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지도, 안느에게로 패닝하지도 않는다. 계단 맨 위에 서 있던 산드라의 옆모습에서 뜬금없이 컷이 되어 계단을 거의 내려온 산드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의 돌출은 산드라가 마치 기절했다 다시 깨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영화는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에 자신을 선택해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로 산드라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단지 틈새를 통해 산드라가 주체성을 회복하도록 만들 뿐이다. ‘자신으로부터’ 현재 상황을 벗어날 의지와 나아갈 용기를 찾아 변화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산드라의 내일을 희망으로 내다본다.
[해당 글은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 216호에 먼저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