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20)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찬실에게 닥친 상황은 절망적이다. 담당하던 영화감독은 죽고, 열렬히 사랑했던 일로부터 소외당하면서 찬실은 영화 제작자로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동시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찬실이의 좌절에 공감하고, 과거와 결별해 자신을 의식하고자 하는 고민에 동참한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가 그와 비슷한 일을 현실에서 겪고 있다는 이유에서 기인하는 감정들은 아니다. 영화는 찬실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듯 시종일관 대화하는 인물들을 향해 가까이 다가간다. 인물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인물의 내밀한 이야기가 시작되고 우리는 그들 서사에 몰입한다.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바에 있어 꾸밈이 없다. 소피의 스타일리스트가 찬실의 근황에 관해 묻자 장 보는 찬실의 모습이 뒤이어 등장하는 것처럼, 인물이 질문을 던지면 곧바로 대답하는 숏이 따라붙는 영화의 태도는 명쾌하다.
이 같은 지배적인 흐름에 물음을 제기하게 만드는 배치가 존재한다. 찬실과 김영이 갈림길에서 헤어진 후 다시 만나는 장면 사이에 끼어 있는 감독과의 과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불쑥 침입한 낯선 것이 아니라 각각 앞 장면에 화답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영화 시작(지 감독의 죽음) 이후 찬실은 온갖 새로운 일을 맞이한다. 그러면서 찬실은 오랜 시간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을 타인을 통해 느끼게 된다. 감독의 죽음이 찬실이의 커리어에 생긴 공백이자 그것의 원인이라면, 곧바로 따라붙는 장면들은 찬실이 겪는 날것의 무언가다. 즉, 전자가 상황의 새로움(이사, 취직)이었다면 후자는 감정의 새로움(위로)인 셈이다.
이처럼 매번 죽음 혹은 사라짐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영화 덕분에 우리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찬실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엇을 마주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떤 새로움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기대에 부응하듯 영화는 장국영이라는 기이한 존재, 타자를 등장시킨다. 먼저 찬실과 장국영이 처음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말하는 사람의 앞모습과 듣는 사람의 뒷모습을 한 프레임 안에 함께 보여준다. 이는 마치 오버 더 숄더 숏으로 보이기도 해 우리는 인물과의 거리, 동일시를 모두 획득하게 된다.
이제 영화 속 장국영의 역할을 따져볼 때가 왔다. 장국영은 아무런 조건 없이 찬실이를 응원하고 그가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찬실 스스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고, 영화를 포기하려는 찬실을 보며 눈물 흘리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장국영은 바로 찬실의 ‘타자’인 것이다. 장국영이라는 타자가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 또 이해 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찬실이 장국영이라는 타자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타자의 존재가 찬실이라는 존재를 현재 머무르고 있는 그 상태 바깥으로 이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변화의 모든 곳에 걸쳐 있으며 서로 간에 침투한다. 따라서 장국영이라는 타자는 찬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찬실 또한 마찬가지다. 찬실과 장국영이 만드는 관계에서 서로 타자가 된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할머니의 시처럼, 영화는 순환에 관한 것이다. 닫히는 순간, 열림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장국영은 새로움이 태어나는 모든 순간에 그의 모습을 바꿔 우리 옆에 존재할 것이다.
[해당 글은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 215호에 먼저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