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김동령, 박경태, 2022)
남극 꼭대기 위에 서면 단 몇 걸음에도 시간대가 달라진다고 한다. 저 멀리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원하는 만큼 시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적 시간도 마찬가지다. 누구든 바라는 만큼 시간을 직조해 낼 수 있으며, 그것의 분기점을 찾아 차례대로 맞추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시간을 이리저리 유영하는 뺏벌의 유령들은 사정이 조금 다른 듯하다. 이들을 만들어진 이야기에 붙잡힌 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그래서 여전히 같은 시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해본다면 어떨까.
뺏벌의 유령들은 누군가 박제된 시간에 손대는 순간을 타고 출현한다. 그들은 묘비 옆에 자란 풀을 매는 손을 따라, 전시되어 있던 사진을 떼어가는 작가의 손을 따라, 그리고 이제는 간판조차 바뀌어 버린 클럽의 문을 여는 사자들의 손을 따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유령들은 매번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현실과 분리된 세계로 물러나기를 요청받는다. 그래서인지 이들 앞에 놓이는 물리적 장애물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막는 수단이자 자기를 데리고 가려는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도구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상이라는 매체로 고정된 시간을 건드릴 때, 뺏벌 유령들은 우리 곁에 불려 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인순은 나이 지긋한 장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는 오롯이 자기 얼굴만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를 소명하기 위해 뺏벌 유령들을 나타나게 하는 순간들을 복기해보자면, 꽃분의 묘비와 인순, 사진과 꽃분이1, 클럽의 문과 꽃분이2로 관계를 정립해 볼 수 있으며, 이로써 인순 역시 꽃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고구마가 인순의 손에서 꽃분이1의 손으로 전달되고, 미군의 머리를 자르는 두 인물의 팔이 앞선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관계는 더 견고해진다. 사자들이 마을에 팔려온 여자가 목 매달아 죽었다고 언급하는 장면에서 목이 잘린 채 프레임을 벗어나는 꽃분이2 역시 마찬가지다. 이후의 장면에서 꽃분이1은 나무에 목을 매단다. 종국에는 한 인물의 개별 서사를 따져 묻는 일은 무용해진다. 사자들이 이야기를 만드는 클럽 장면 곳곳에 중구난방으로 삽입되는 여러 꽃분이들의 이야기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뺏벌에는 외관만 달리한, 그러나 시대의 얼굴을 공유하는 꽃분이들의 이야기가 넘쳐나고 또 이어진다.
이처럼 사자들의 이야기를 따라 꽃분이들이 재현된다. 하나는 반대로, 다른 하나는 그대로. 전자는 미군이 야산에서 꽃분이를 돌로 때려죽이는 대신 꽃분이들이 미군의 머리를 자르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후자에서는 도로가 들어선 후 뼈가 이리저리 흩어진 꽃분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는다는 사자의 말마따나, 인순은 몸을 결박당한 채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꽃분이가 웃는다. 그러자 인순은 우는 소리를 낸다. 이제 꽃분이들이 같이 웃는다.
관계는 역전되는 듯했으나 끝내 그러지 못한다. 그 누구도 더는 꽃분이들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을 기억할지라도 성매매 여성으로 기억하는 세계 내에 비존재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는 너무나 익숙해진 소음에 텔레비전 소리를 키우는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익숙해진 슬픔에 더는 말 붙이기를 주저하는 우리에게, 등을 반짝이며 그들은 여전히 여기에 죽지 못해 살아있다고 외치며 시작한다. 꽃분이들 역시 긴 디졸브처럼 사라지지 않기를 갈망하고 계속해서 유령처럼 출몰하지만, 사건보다 선행하는 텍스트들 앞에서 속절없이 밑으로, 가장 밑으로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