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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틴 Apr 12. 2023

지지 않는다는 말 - 나의 구원

지지 않는다는 말 - 김연수 산문집


p.49

“가까운 사이인데도 난 당신을 몰라요. 당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그러니 한 번 더 말해주세요.”

그 말에 당신이 한 번 더 말하기 시작하면, 설사 그 말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 번 더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한 번 더 말하고 내가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관계는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그러니 우리 사이를 유지하는 건 막힘이 없는 소통이 아니라 그저 행위들, 말하는 행위, 그리고 듣는 행위들일지도 모른다.


p.225

구원은 굴하지 않는 강철같은 인간의 마음이 하는 게 아니다.

인간들이 모두 변하고 난 뒤에도 찌꺼기처럼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얼룩 같은 게 우리를 구원한다.

그걸 일러 영혼이라 할지도 모른다.


p.246

나는 더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나기를, 그리고 그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말하자면 예측할 수 없이 변하는 날씨처럼, 늘 살아서 뛰어다니는 짐승들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처럼. 

그처럼 단 한순간도 내가 아는 나로 살아가지 않기를,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있으면 그 언제라도 편안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종교에 관심이 없는 나는 이상하게도 ’구원’이란 단어를 듣거나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컹한다.


책에서도 구원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한 번 더 말하고 들어주는 노력이 관계를 구원하고(p49), 찌꺼기처럼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얼룩이 개인을 구원한다고 했다(p225). 한 번 더 노력하는 것, 남은 얼룩을 보기 위해 인간들이 모두 변할 때까지 남아있는 일은 모두 인내를 요한다.


몇 해 전 참여했던 한 특강에서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혜나님은 미소가 자신을 구원할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니 미소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를 발휘해서 미소지을 수 있다면, 그럴 여유가 있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내 미소가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까.


미소든, 한 번 더 말하는 노력이든, 남아있는 얼룩을 보는 일이든 구원은 스스로를 내려놓는 일과 가깝다.

바람에 출렁이는 갈대처럼 의도를 내려놓고 나를 맡기는 것. 모든 것들이 나를 투과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책에서도 ‘젖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물방울처럼 자신이 투명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물에 젖지 않으려면 물 자체가 되면 되고 쓰러지지 않으려면 이미 쓰러져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투명해지고 싶지 않은지 또 다른 내가 열심히 의문을 던진다.


내가 원하는 건 젖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게 아니다. 애초부터 젖을 일이 없고 쓰러질 필요가 없는,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무한한 자유 그 자체를 바란다. 오직 자유 그 자체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자유를 갈망한다는 건 이미 내가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원했던 구원은 사실 투명한 자유였다. 바람에도 파도에도 쓸리거나 덮이지 않는 투명하고도 무한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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