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2018
버닝. 종수가 해미의 방을 처음 찾는 장면.
해미의 방 문을 열면 오른편에 바로 부엌이 있다. 한국의 원룸이다. 신발장도 따로 없이 부엌 찬장 한편에 신발 여러 켤레가 구겨져 있다. 더러운 부엌은 부엌의 기능을 넘어선다. 종수는 뻔한 풍경에 놀라면서도 너스레를 떨어야 한다. "전에 살던 집엔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었는데." 카메라는 종수의 시선을 따라 싱크대를 거쳐 방의 전면으로 향한다. 곧 해미와 종수는 키스를 하고 섹스를 앞둔다. 해미는 침대 밑에서 콘돔을 꺼내 종수의 페니스에 끼워 준다. 익숙한 일. 종수의 시야에 희미한 '밀양'이 비친다.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북향인 방에 하루 단 한 번 찾아온다고 했던 그 빛. 이른 기적에 종수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이내 그 빛은 옅어진다.
부엌은 종종 가사의 상징이다. 크기와 청결 상태, 그릇이나 수저의 개수와 음식의 흔적. 식구가 끼니를 함께 때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면 식구의 궤적은 부엌에 남는다. 1960년대 영국의 키친싱크 리얼리즘 영화는 부엌의 설명력을 놓치지 않는다. 노동계급 가구의 삶이 키친싱크에 남아있기 때문에 키친싱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계급갈등의 수많은 단면이 담긴다. 동시에 싱크대에 난잡하고 더럽게 쌓인 설거지 자체가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은유다. 영화가 계급을 얘기하는 방식이 싱크대의 더러운 설거지와 유리될 수 없다. 키친싱크 리얼리즘 영화들이 그랬다. 유려하지 않아 비판받았지만 영화에 대한 설거지는 각자의 몫이었다.
종수는 한때 싱크대 바로 옆에 놓은 변기를 끼고 살았다. 먹는 것과 배출하는 것의 병렬. 벤의 집 부엌을 맴돌다 화장실이 도대체 어딘지 찾지 못해 파스타를 해주겠다는 벤에게 물어야 하는 상황과의 병치. 해미의 사정은 종수가 전에 살던 집에 비해 조금 더 낫지만 그래 봤자 일상사의 모든 광경이 카메라의 패닝 한 번에 담긴다. 해미의 키친싱크는 곧 종수와 해미의 섹스가 예정된 침대에서 한 걸음이다. 그곳에서 남산타워가 종수에게 기적의 순간을 내리지만 이질적이다. 도심의 어디에서라도 보일 것 같아 위압적인, [400번의 구타]의 에펠탑처럼 [버닝]의 남산타워는 서울의 팔루스로 서 있다. 오르가즘은 조금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창동의 키친싱크는 키친싱크 리얼리즘 클래식인 [꿀맛]만큼 처절하게 과장됐다. 흑인 혼혈을 임신한 조와 동성애자인 제프리의 가족적 결합이 좌절된 뒤 가이 포크스 제웅이 광장에서 타오른다. 종수가 갈구하던 해미와의 연대가 허탈한 용두질로 끝난 후 포르셰가 화염에 휩싸인다. 찬란한 불꽃이 타오르지만 들불을 만들지는 못한 채 재만 남길 것이다. 제프리는 떠났고 해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간의 삼각관계가 존재하고 그들 중 누군가가 떠나면서 불안한 연대가 종료되는 줄거리는 키친싱크 리얼리즘의 진부함이다. 가학과 부정으로 점철된 부부를 떠나는 여자([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두 남녀가 뻔한 삶의 경로로 들어설 때 이미 잊힌 불륜녀([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서로 있느니 못한 모녀에게서 지워져야 하는 존재인 동성애자([꿀맛]).
모닥불이 꺼진 뒤에도 설거지는 계속되어야 한다.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찾아 논밭을 달리는 장면들은 [장거리 주자의 고독] 오프닝 시퀀스를 닮았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들판의 풍경을 정처 없이 달려야 하는 키친싱크의 주인공. 장거리 주자는 더 이상 달리지 않겠다는 저항과 복수 이후에도 고독한 레이스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키친싱크 리얼리즘 영화는 그렇게 노동계급의 삶을 스산하게 설명한다. 더러운 부엌과 그 곁에서의 섹스는 종수가 견뎌내야 하는 삶이다. 도식적이지만 시궁창 같은 현실을 이해해야 할 때 여전히 계급만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