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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님 May 16. 2018

이기주의에 암살당한 자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72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폴이 잔의 아누스에 버터를 바르고 강간하는 장면.


폴은 이제 막 빈집에 들어선 잔에게 다짜고짜 버터를 가져와 달라고 한다. 버터를 발라 먹을 빵도 거의 남지 않았는데 잔이 바닥에 내던진 버터가 무용해 보인다. 각자의 거울에 비친 서로의 모습은 매우 이질적인 것을 병치한 것처럼 화면을 가른다. 투정 부리는 잔은 곧 빈집의 바닥 아래 비밀 공간을 발견한다. 갑자기 버터를 가까이에 두는 폴에게 잔은 비밀 공간에 있을지도 모를 '가족의 비밀'을 얘기한다. 폴은 잔의 바지를 벗기고 버터를 조금 떼어내 잔의 항문에 바른 뒤 페니스를 삽입한다. 폴은 '가족의 비밀'이라는 것에 대해 읊기 시작한다. 잔은 저항하면서도 따라 읊기를 강요하는 폴의 명령을 따른다.


"신성한 가족. 선량한 시민의 교회. 아이들이 최초의 거짓을 내뱉을 때까지 고문당하는 곳. 억압에 의해 의지가 꺾이는 곳. 이기주의에 암살당한 자유."



68의 5월이 일어난 지 4년. 68은 혁명과 해방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못했다. 68의 지분을 무분별하게 사들였던 미국은 68의 정치적 파산에 당황스러웠다. 배신감과 허망함. 이내 깨달음. 68은 이미, 혹은 애초부터 보보스의 영역이었다. 반문화를 내세워 권위를 부수는 데 집착하지만 실상 자신 자본의 권위만은 도전받기를 원하지 않는.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출구라고 생각하는.


혁명을 믿었던 미국인 폴은 우연히 만난 프랑스인 잔과 아주 긴 탱고를 추기 시작한다. 긴장과 저항이 오간다. 확신과 희망을 잃은 폴이 공허한 소비자에 다름없는 잔을 향해 내딛는 공격적인 스텝으로서의 강간. 혁명의 열매처럼 금은보화가 있을 줄 알았던 68의 바닥 아래에는 오직 공허한 비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폴이 읊는 그 비밀은 마치 68이 실패한 미국에 대해 낱낱이 까발리겠다는 협박과도 같았다. 양심이 있다면 그 관찰을 보거나 듣고도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겁탈이었다. 선량한 시민의 교회. 이기주의에 암살당한 자유.


수십 년이 지나 이 장면은 괴상하게 언급되기 시작한다. '잔 역을 맡은 마리아 슈나이더는 이 장면에서 실제로 강간당했다', '연출이 아니라 실제 성관계가 있었다', '강간 장면은 애초에 대본에 없던 내용이었다.' 언론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열광했지만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영화를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장면 없이 대본이 완성되거나 이해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감독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마리아 슈나이더 역시 실제 성관계나 강간은 없었다고 했다. 사전에 합의가 없었던 것은 버터를 윤활제로 쓴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부분 역시 윤리적 질문들이 남지만 공분한 대중들은 어떤 사실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성한 영화, 선량한 관객의 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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