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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민 Sep 04. 2022

[사월에 영화]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포)

불안하고 불확실한 20대의 공기와 습도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기도 전인 아침,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시간이 멈춘다. 우연하게 만난, 어쩌면 운명일지 모르는 그 사람에게로 달려간다. 밤새 사랑을 이야기하고 키스를 나눈다. 마법 같은 순간. 포스터를 장식하는 이 장면. 그런데 이 장면은 사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영화의 제목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지만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율리에에 대한 영화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모르는 게 너무도 많은 20대 율리에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12장과 프롤로그, 에필로그로 구성이 되어있다. 마치 1년의 처음과 끝을 구성하는 12개월처럼. 프롤로그 속 율리에는 화려한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불안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중에서야 관객은 그가 동거하는 남자친구의 전시회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인 박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전시회장을 떠난 율리에는 방황하며 도시를 걷는다. 그리고 그날 밤, 운명처럼 느껴지는, 재회마저도 운명적인 에이빈드를 만난다.


영화는 율리에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불안함과 불확실성을 다방면에서 섬세하게 그려낸다. 20대가 된 율리에는 모범생이고 싶다는 강박 때문에 외과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심리학이 더 잘 맞는다는 생각에 전공을 바꾼다. 하지만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니 사진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하루아침에 멋있고 잘 나가는 사진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자신감이 없어서인지, 사람들이 직업을 물어볼 때 율리에는 사진작가라는 말 대신 서점에서 일한다는 말로 얼버무린다.


모든 게 불확실한 율리에와 달리 악셀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운 것에 대해 명확하게 언어로 전달할 줄 안다. 율리에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본인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판단하고 정의하는 악셀의 모습이 갈수록 숨이 막힌다. 율리에는 모르는 것이 많다. 극 중 율리에는 자주 "모르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 나중에 아이가 생겼을 때도, 아이를 가져서 기쁜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은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악셀이 만남 초반에 이별을 고하면서 “너는 너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할 테고, 나는 그 시간을 이미 지나왔어”라고 말했듯, 율리에는 아직 그 시간을 거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잘 모른다.


모르겠는 것 투성인 시간을 함께 보내온 악셀이 어느 날 췌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악셀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율리에는 악셀을 만나러 가지 않는다. 그 대신 밤새 도시를 방황하며 걸어 다닌다. 그리고 아침 해가 떴을 때, 그러니까 아마도 악셀이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 율리에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그리고 악셀로 가득한 20대에게 이별을 고하고 청춘의 다음 장에게 인사하듯, 눈물과 함께 희망이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에필로그 속 율리에는 예술적인 사진을 마음껏 찍는, 성공한 사진작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임한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는 주거 공간도 가지고 있다. 에필로그에서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대신 편안한 일상복을 입고 있고 율리에는 그때처럼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율리에는 당분간 그렇게 매일매일 성실하게 사진을 찍고, 집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것으로 보인다.


극도의 불안함과 방황을 거쳐간 청년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때의 모습이겠다. 율리에가 나중에 아기를 가지고 싶어 할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율리에가 그 판단을 내리기까지, 확신을 가지기까지 충분히 방황하고 고민해보았는지가 중요하다.


영화의 색감과 구도, 연출뿐만 아니라 음악까지도 너무 아름답고 영화 내용과 조화로워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뭐가 있는지 찾아보게 만들었다. 특히 악셀을 연기한 앤더스 리의 연기가 정말 인상 깊었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충분히 고민하고 방황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마주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지만,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만화를 그리고 괴짜 같은 여자친구와 예측 불가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에 애정을 느끼는 중년 남성을 정말이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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