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놓인 두 찻잔 속에는 그보다 농익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화는 하루 동안의 시간 흐름을 쫓아가면서 전개된다. 이른 아침 오랜만에 만난 과거의 연인. 그다음에는 4-5개월 전 잠깐의 만남을 가졌던 남녀. 해가 넘어갈 때 즈음 만난 가짜 모녀. 그리고 늦은 저녁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두 사람. 카페 밖에서 각자의 세상을 각자의 생각과 판단으로 채워나가지만 카페에 마주 앉아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만큼은 상호 간의 진실을 마주한다.
각자 앞에 놓인 차와 음료는 그 사람을, 그리고 두 사람 간의 관계성을 섬세하게 대변한다. 오랜만에 만난 과거의 연인이 각자 주문한 맥주와 에스프레소는 일반인과 연예인,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의 차이만큼이나 이질적이다. 어쩌면 설탕 유무를 빼고는 같은 카페라테를 마시던 가짜 모녀가 더 가까운 사이일지 모르겠다. 같은 차를 주문한 남녀는 말할 것도 없다.
한 사람과 한 사람, 이 넓은 세상에 단지 두 명이 만났을 뿐인데, 그리고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끝난 짧은 대화일 뿐인데, 각자의 긴 역사와 꾹꾹 눌러 담은 마음들이 말로 승화되지 못하고 그렇게 시공간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그 흔적이 남아 또 하나의 이야기로, 역사로 남는다.
누군가를 같은 공간에서 만나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서로의 세상이 만나 충돌하거나 융화되고, 또 그렇게 새로운 성질이 덧입혀지는 것인가 보다. 그 차를 중간에 두고 하는 말들은 때로 부족하고, 하지 않는 말들은 때로 많은 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게 스쳐간 마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갑게 식어버리기도, 오래 우린 차처럼 진해지고 쌉싸름해지기도 한다.
카메라 구도, 색감, 오디오 외에도 각 배우들, 특히 포스터 속 배우들의 표정, 시선처리, 입 모양, 손동작, 어느 것 하나 섬세하지 않은 것이 없어 매 시퀀스마다 불가항력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최악의 하루> 김종관 감독 영화였다. 긴 시간 등장하지 않아도 인물 한 명, 한 명과 그 인물들간의 구도, 그리고 그 구도 뒤 억겹의 역사를 단순하지만 직관적으로 설명해내는 표현력에 또 감탄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