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양육자가 지배하는 세계 속 생존기
부모(양육자)는 자녀를 사랑하는가.
엄마는 자녀를 사랑하는가. 사랑해야 하는가.
자녀는 엄마를 사랑하는가.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 혹은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아이였을 때, 나는 아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 사랑의 방식이 보통의 방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주 어릴 때부터 존재를 부정당하면 어떻게 자라게 될까. 거기에다 생각과 감정도 부정당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한 아이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존재까지 부정하면서 키운 아이는 어떻게 자라게 될까.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뭐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뭔지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내가 느낀 이상함의 실체를 자라는 내내 쫓았다. 몇 년 전부터는 아동 학대와 관련된 논문을 찾아보았음에도 뚜렷하게 해소되는 것이 없었다. 모든 사례와 양상이 미묘하게 각도가 어긋난 듯 비딱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삶을 길에 비유한다면 나의 길 위엔 표지판이 없고, 항상 깊이가 다른 구덩이들이 파여있었다. 가끔 어떤 곳은 판판한 길처럼 멀쩡해 보여서 눈에 보이는 주변의 구덩이를 피해 지나가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처럼 그곳에 빠지곤 했다. 그 상황은 너무나 익숙해서 나는 늘 빠진 줄도 모르고 구멍 속을 허우적거리며 헤집다 겨우겨우 구덩이 위로 올라오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올라오면 그 구멍을 메웠다. 다시 빠지면 안 되니까.
이 행동은 몇 십년 째 반복되었던 탓에 너덜너덜해진 옷과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로 여전히 구덩이에 빠지고 기어 올라와 구멍을 메우고 다시 또 길을 헤맸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는 구덩이를 만든 적이 없는데’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근거가 없었기에 떠올리기 무섭게 사라졌다.
그런 길 위에는 구덩이 말고 문도 있었다. 종종 길 위에 문이 등장했다. 그런 문 뒤로 나를 숨기곤 했다. 어떤 문들은 자물쇠로 잠겨있어서 열지 못했다. 길을 헤매면서 열려 있는 문 뒤로는 나를 숨기기도 하고, 가끔 발견하는 열쇠로는 잠긴 문을 열어서 어떤 단서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문을 열고 저 문을 열고, 또 저 멀리 있는 문을 열고, 열고 또 문을 열어도 마음속에 찝찝하게 남아있는 문제를 해결할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수많은 문을 열었음에도 그 무엇도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계속됐다. 그렇게 나는 헤매기만 하다가 언제 성인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운명처럼 나르시시스트 관련 도서를 읽게 되었다. 책 옆에는 낯선 열쇠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때 나는 탄식의 발음이 ‘아,’ 인 것을 직접 깨닫게 되었다.
열쇠를 주워 드니 어디로 가야 할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홀린 듯 그 길을 따라갔다. 문이 하나 있었고,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문 앞에 서자마자 이 문을 열기 전과 후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면, 문을 열기 전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일대일 대응으로 원인과 결과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십 년째 멀쩡한 길을 걷지 못하고, 수많은 단서들을 모았음에도 무언가 빠졌다는 생각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를 이끌고 표지판도 없는 길을 헤맸는데, 찾아 헤매던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나르시시스트 양육자’에게 길러졌다. 양육자를 전문가에게 데려가 검사받게 하는 상황을 만들 수 없기에 이것은 오로지 나의 의견이다. 하지만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책에 나온 설명을 통해 평생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기도 하고, 책에 수록된 사례와 비슷한 일들을 직접 경험했으므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나르시시스트’를 연결하여 에세이를 써 내려갈 예정이다. 또한 몇몇 경험들은 나의 어린 시절 일기장에 기록된 것을 증거로 제시할 생각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을 소설로 담아낼까 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탈을 쓰고 내가 경험한 것들을 소설 속에 녹여낼까도 생각했다. 분명 에세이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지만 자꾸만 피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에세이를 쓰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쓰기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실제로는 야금야금 쓰긴 했는데 공개하는 것에는 극도로 거부감이 들었다. 이유를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가 이번에 이 글은 에세이로 써야 할 텐데 왜 나는 에세이가 싫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내가 길러진 방식을 돌아보니 살아남기 위해 ‘나’를 없앴기에 쓰기 싫을 수밖에 없었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글을 쓰면 ‘나’는 ‘나’가 된다. 앞으로 이 에세이를 쓰면서 계속 언급하게 되겠지만 살아남으려면 ‘나’라는 존재가 없어야 그나마 덜 힘들었기 때문에 에세이를 쓰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나를 없앴다가도 글을 쓰면 나는 다시 ‘나’가 되므로 다시 또 고통에 휩싸이게 되니까.
나는 나의 존재, 생각, 감정 등을 부정당하면서 자라왔고, 부정당한 모든 것을 토대로 나는 길러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하는 모든 행동, 내가 가진 모든 생각이 부정(不正)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듣는 부정적인 말로도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쳤기 때문에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나 자신을 타인에게 전시하는 것과 같아서 그러한 상황 자체를 차단 하는 것은 나에겐 옳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 내용은 에세이로 써야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에세이로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주제에 관해 글을 쓰기로 하고, 타인이 볼 수 있는 곳에 올리기로 마음먹고 나서도 계속 생각했다. 이런 글을 타인에게 공개하는 것이 맞나.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런 글을 누가 읽어. 이런 글을 써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양육자에게 감사하는 마음 없는 이기적인 파렴치한이 아닐까. 하면서 나를 또 의심하고 부정한다.
그러면서도 이 글을 어떤 방향, 어떤 방식, 어떤 내용으로 쓸지 고민을 한다. 이 글은 지금이 아니면 못 쓸 것 같아서.
계속 고민만 하다가는 영영 못 쓸 것 같아서 일단 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완성된 글을 올려야지 보다는 일단 쓰고 보자, 뭐라도 써야 나중에 수정을 하든 내용을 다듬든 할 수 있으니까, 경직된 생각에 힘을 조금 풀고 꾸준히 써서 올리기부터 하자, 끝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앞으로 써 내려갈 이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이 글은 독립출판을 염두하고 쓰는 글입니다. 올해 말로 계획하고는 있지만 글을 쓰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계획이 고정되면 공지 예정)
2. 출판을 하게 될 경우, 출판되는 책은 퇴고를 거치면서 내용이 살짝 바뀌거나 수정되거나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대신 연재했던 글은 수정없이 포스타입에 유료로 남겨둡니다.(출판 시 소장 가격 변경+공개 상자 이동 예정/현재는 소장 100원 고정) / 브런치 스토리의 경우 글이 비공개로 전환될 수도 있습니다.
3. 개인적인 경험을 글로 풀어쓰기로 마음 먹은 만큼 어떤 사건들은 임의로 수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