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에 비친 나르키소스

나르시시스트 양육자가 지배하는 세계 속 생존기

by 은현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되는 신화 속 인물 나르키소스.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 자란 자녀’들을 ‘물에 비친 나르키소스’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물 밖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나르키소스에게 그와 가장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는 ‘수면 위에 비치는 나르키소스’. 물 속에서 수면으로 바짝 고개를 붙여 코에 물이 들어가는지, 눈과 입, 그리고 귀에 물이 들어가는지 신경 쓰지 않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모른 채,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물 밖에서 자기 얼굴을 보려고 하는 나르키소스의 모습을 최대한 똑같이 반영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존재. 그런 행동이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자란 자녀들을 비유하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스트’라는 용어를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까지 나와 연관 있는 단어인 줄 몰랐다. 왜 몰랐을까? 싶다가도, ‘나르시시스트’라는 용어가 가진 이미지(으스대고, 자랑하고, 과시하고, 주목받고 싶어 하는 모습)는 ‘외현적 나르시시스트’의 묘사에 가까운데, 엄마의 모습과 달라서 연관 짓기 어려웠다.

그러다 읽게 된 책이 『그 사람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나르시시스트를 알았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느꼈던 이유는, 엄마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였다. (그 외에도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의 모습도 있고 ,‘악성’ 나르시시스트 모습도 가지고 있다.) < 나르시시스트 관련 유튜브 영상 링크 클릭하기 → "나르시시스트가 보이는 의외의 특징들 with 토킹닥터스" https://youtu.be/xlL7KNPHOXU?si=QPnOf4tuKOXnUdyb >

그 이후로 미친 듯이 관련된 책을 읽었다. 왜 그전에는 몰랐을까. 분명히 나르시시스트라는 용어를 알고 있었는데.

물론 알고 있었더라도 지금처럼 엄마와 거리를 둘 방법이 없었더라면, 엄마의 손아귀에서 계속 붙들려있었더라면, 나르시시스트든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든 관련 도서를 읽더라도 내가 책 속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르시시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기애’라고 불리는 ‘나르시시즘’은 너무 모자라거나 너무 과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이것에 관해선 책 『나르시시스즘 다시 생각하기』을 추천한다. 나르시시스트를 만나면 도망가세요, 자신을 지키세요. 등등 나르시시스트의 위험한 점을 짚는 책들 사이에서 조금은 중립적인 시선―나르시시즘을 습관과 중독의 시선으로 바라본다.―으로 설명하는 책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위안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습관’, ‘나르시시즘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적당한 나르시시즘은 행복하고 충만하고 결실을 맺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 뿐이 아니라 꼭 필요하기까지 하다.’ _『나르시시스즘 다시 생각하기』中

이 책에서는 나르시시즘은 스펙트럼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우리는 모두 상황에 따라 중간(건강한 지점)을 기준으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만일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양극단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 혹은 사람과의 관계 내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있고,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있다. 우리 집은 네 명. 엄마와 아빠, 동생과 나.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무 문제가 없는.

우리 집에는 암묵적인 역할놀이가 있었다. ‘역할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책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붙여본 이름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들에게 특정 역할을 맡게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강요하는데’, 책 『나에게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에서 나온 설명과 용어를 인용한다면 나는 ‘스케이프고트 자녀’와 ‘트루스 텔러 자녀’의 역할이었다.

[스케이프고트 자녀]
_『나에게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 _chpter5 그들의 가족을 들여다보면中)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풀 수 있는 대상, 즉 자신의 펀칭백 같은 존재인 스케이프고트*가 필요하다.”
*스케이프고팅(scapegoating)*은 당하는 대상. 누군가를 스케이프고팅한다는 것은 모든 잘못에 대한 탓을 돌리면서 그 대상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이며, 스스로의 책임은 회피하는 것.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신의 결함을 자녀에게 투사해서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녀때문에 생기는 것인 양 행동한다. (…) 스케이프고트 자녀는 부모의 가스라이팅과 정신적, 신체적 학대의 대상이 되다보니 매일매일 살얼음판 걷듯이 불안한 마음으로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보낸다.”
[트루스 텔러 자녀]
_『나에게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 _chpter5 그들의 가족을 들여다보면中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건강하지 않은 측면들을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자녀들이 있다. 그들은 ‘나르시시스트’라는 단어 자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분명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일찍이 인지한다. 부모가 보이는 행동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깨우치는 성숙함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트루스 텔러 자녀들은 어떻게 본능적으로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건강하지 않은 심리와 행동들을 감지하고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는 기질의 차이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선천적으로 공감 능력과 통찰력이 뛰어나고 상대방의 감정에 예민하며, 감성지수EQ가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상대 나르시시스트에게 본인한테는 원래 타고난 그런 능력들이 없다는 것을 더 잘 느끼게 된다.”

“트루스 텔러 자녀들은 점차 성장하면서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어떤 부분들이 잘못됐는지 바른 말을 하디고 하는데,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자녀에게 더욱 매섭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책에서 ‘여러 개의 역할을 중복으로 맡기도 하고 성장 과정에서 역할이 바뀌기도 한다’라는 내용도 나오는데, 위의 두 가지 역할 외에도 ‘골드 차일드 자녀’, ‘인비저블 차일드 자녀’ 역할을 때에 따라 맡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조금 기민한 아이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일기장엔 ‘우리 가족에게 문제가 있고 상담을 받아야 한다’라는 내용이 적혀있기도 했다. 그 ‘문제’의 중심에는 엄마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쏟아내는 감정에 의문을 품으며 자랐고, 나에게 쏟아내는 감정이 인위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고, 엄마가 나에게 쏟아내는 감정은 왜인지 ‘자기소개’ 같았다.

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존재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라왔기에 내가 깨달은 위의 점들은 소리 소문 없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니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은 ‘감정’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아닌 실제로 겪는, 눈에 보이는 ‘비슷한 경험의 반복’이었다.

중학생쯤부터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학교에서 반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반복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쯤엔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와 비슷한 사람만 주변에 꼬였다. 그런 사람만 나에게 꼬이는 건지, 내가 그런 사람만 골라서 만나는 건지 ‘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라는 말이 이런데 쓰는 말인가 싶었다.

엄마에게 벗어나지 못한 채 20대 초반을 보내면서 언제부터는 내가 ‘엄마’인 채 살아가고 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느낌이 들었을 뿐, 그걸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인지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여전히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이걸 벗어나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초기 외상적인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그 경험에서 받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심리가 존재하는데 이를 ‘반복 강복’이라고도 표현한다.” (책 『나에게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 中)

나는 어릴 때 집안에서 엄마와의 파괴적인 관계에서 경험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집 밖에서도 엄마와 비슷한 사람들과 파괴적인 관계를 반복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던 거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비슷한 경험의 지긋지긋한 반복, ‘가짜 삶’이라는 느낌이 드는 무언가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엄마에게 20년이 넘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나는 무언가를 벗어난다거나 상황을 타개할 방법에 쓸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에다 20대 중반부터는 삶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온갖 심리적(혹은 병리적이라 말할 수 있는) 및 신체적 증상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고, 어린 시절 경험으로 파생된 다양한 후유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걸 방치한 채 사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벼랑 끝으로 떠밀려 발끝에 힘을 꽉 주고 버티면서,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버릴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거나.

그런 느낌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들러붙어 있었기에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자체를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심리·신체적 증상을 겪고 있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왜 힘든지 몰랐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은 나의 삶을 끝내버려야겠다는 다짐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나 많은 엄마의 올가미가 나를 옭아맸는지 안다.


보이는 학대와 보이지 않는 학대가 쌓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나의 삶이 그런 경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도. 하나씩 깨닫게 되는 것들이 늘어나자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생의 시간이 검게 얼룩졌다. 살아온 모든 시간이 거짓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고, 깨닫게 되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폭력일까? 사랑이야. 훈육일까? 애정이야. 아냐, 내가 잘못된 거야. 아냐, 그래도 아이를 때리는 건 잘못된 행동 아니야? 아냐, 내가 잘못했으니까 맞은 거야. 아냐,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근데 나 왜 맞았지? 오늘은 잘못한 거 없었어. 아냐,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 거야. 아냐, 근데 왜 자꾸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아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던 거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된 거야. 그럼 나는 뭐지?

이런 생각들로 차곡차곡 쌓여 성인이 된 나는 고장 난 걸 넘어 완전히 망가졌다.


이 모든 것은 가정 내에서 일어났고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만난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다른 집도, 다른 친구들도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다들 그런 말 못 할 문제 하나 정도는 품고 산다고 하니까. 나도 그런 종류의 문제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다른 친구들도 어떤 이유든지 잘못을 했으니 두들겨 맞고, 비난을 받고, 온갖 욕을 들으면서 존재를 부정당하고, 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며,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당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기고, 나의 개인 공간이 존재하지 않고, 삶의 통제권을 가질 수 없는 환경 따위를.

어린 시절 내가 막연히 이상하다고 여긴 모든 행동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가정에서 자라왔으니까. 어떤 어린아이가 엄마(부모 혹은 양육자 등)를 버리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 아무리 이상한 가정이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상황에 몰려 강제로 쫓겨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세상을 쉽게 버릴 수 있을까.

‘나’라는 애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 말하는 그곳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것, 그 자체만으로 많은 고통이 수반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을 잘라내고 뼈를 깎는 고통을 품에 안고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나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부모라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과 거리를 둘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부모에게서 떨어져나와도 생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참고 도서]

『그 사람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입니다』

『나르시시스즘 다시 생각하기』

『나에게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