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양육자가 지배하는 세계 속 생존기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학대는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또렷하게 느낄 수 있고 눈에 보이기 때문에. 따라서 매일같이 폭력에 노출되었던 기억이 나에게 남아있었으므로. 아동 학대 논문을 찾아본 건 그 이유에서였다. 일단 맞은 적이 있으니 그 지점부터 알아봐야겠다고.
내가 어릴 땐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어느 정도의 폭력은 훈육이라는 포장지에 그럴듯하게 잘 싸서 별문제 없이 체벌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나보다 더 위 세대는 폭력이 당연하면서도 난무하던 시대였기에 굳이 따지자면 사회적으로 조금씩 폭력이 옅어지고 있던 과도기 상태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였기에 내가 엄마의 행동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과하지 않나? 싶다가도 적당한 폭력은 훈육의 연장선이고, 체벌은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니까, 엄마는 나의 보호자이자 양육자니까. 엄마가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니까.
나는 학원에 다닌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학원이라는 장소를 싫어했던 것도 같다. 내가 직접 생각한 건지, 엄마가 주입시킨 생각일지 알 수는 없겠지만, 나는 ‘학원이랑 안 맞아. 학원 안 가고 싶어’라는 생각을 달고 살았는데 돌이켜보면 엄마가 나에게 늘 하던 “너 학원 가기 싫어하잖아.”라는 말이 얼마만큼 내 생각에 영향을 미쳤을지는 알 수 없다.
단순히 싫다는 이유만으로 학원에 가기 싫어한 것은 아니었을 거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매일매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겨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기에 학원에 가기 싫었던 것도 같다. 또 하나의 작은 사회인 학원에서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된 상태로는 타인과 소통하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을 테니까.
엄마는 나를 직접 가르쳤다. 학원을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치는 부분에서 자부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학원 강요 안 하는 착한 엄마’, 혹은 ‘아이의 뜻을 존중하는 부모’라는 이미지를 챙겼다. 실제로 나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기억하기로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엄마가 직접 공부를 알려주었다. 얼마나 자주 이런 시간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과목은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수학이었고, 과목이 늘어난 고학년 때부터는 주로 수학과 사회(한국사 부분)였다.
엄마가 나를 붙들고 다른 과목(국어, 영어, 과학) 수업을 한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이 글을 쓰다가 깨달았다.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엄마 앞에서 수학과 사회 과목을 제외한 다른 과목 교과서나 문제집을 펼쳐보았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종합 문제집 같은 걸 풀긴 했어도 엄마가 직접 수업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다른 과목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던 걸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실제로 수학과 사회만 엄마가 가르쳤을까?
다른 과목의 성적이 좋았냐면 또 그건 아니라서 수업을 하려면 골고루 했어야 맞지 않나? 거기에다 중학생 때는 학교에서 사회 시간에 세계사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엄마의 수업은 ‘한국사’만 진행되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자신이 중학생 때까지 공부를 잘 했다고 했다. 자신은 수학을 잘했고, 국사를 가장 잘했다고.)
거실에는 좌식 테이블이 하나 있었는데 엄마가 수업을 시작하면 그 책상은 공부 책상이 되었다. 공부 책상에 앉을 땐 마주 보고 앉을 때도 있었지만, 엄마의 손이 닿는 오른쪽이나 왼쪽 대각선에 앉기도 했다. 대각선에 앉을 땐 주로 엄마의 오른쪽에 앉았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준비물이 있었는데 교과서와 문제집, 필기구, 연습장이 각 자리를 잡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혹은 엄마와 나 사이에는 항상 회초리가 있었다. 있어야 했다.
회초리는 얇은 나무 봉이 될 때도 있고, 효자손이 될 때도 있고, 안마봉이 될 때도 있고, 가끔은 두꺼운 나무 봉이 될 때도 있고, 리모컨이 될 때도 있다. 손에 잡을 수 있는 길고 막대기 같은 모양이라면 뭐든 될 수 있었다. 그걸 가져오거나 가져다 놓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어떨 때 엄마는 회초리를 준비 해놓지 않았다고 나보고 가져오라고 시키거나, “아니, 꼼짝 말고 앉아 있어.”라고 명령하면서 나를 꼼짝 못 하게 해놓고 동생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일단 수업이 시작되면 엄마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회초리를 가져오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는 날이면 별이 보일 정도로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답을 틀리면 맞았고, 문제를 풀다가 실수해도 맞았고, 엄마의 수업 설명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맞았다. 나는 오른손에 연필을 꽉 쥔 채 고개를 문제집에 고정하면서 나의 왼편에 놓인 회초리를 곁눈질로 보며 언제나 정답을 떠올려야 했다.
종종 같은 상황에서 때리지 않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들고 있던 펜이나 연필로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리면서 치거나 꾹꾹 밀어버리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회초리가 없을 때도 있었다. 사실 회초리가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내가 풀고 있는 문제집이나 옆에 펼쳐두었던 교과서가 그대로 내 머리에 내리꽂히는 임시 회초리가 되었다. 문제집으로 맞고 나면 나는 얼른 문제집을 회수해서 방금까지 풀던 위치로 재빠르게 펼쳐야 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문제를 풀어야 했다.
어떤 날은 펼쳐진 문제집을 아닌 척 양팔로 힘을 꽉 주고 눌러서 빼앗기지 않으려고 정신이 팔려있을 때면, 엄마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쓰지 못하는 이면지를 끼워둔 클립보드를 임시 회초리로 사용했다. 그렇게 임시직을 맡은 클립보드 하나는 어느 날엔 부서져 운명을 다하기도 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가르쳐주는 것이 좋았다. 그걸 사랑이라 여겼다. 원래 사랑은 득과 실이 뚜렷한 거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라고.
교과서나 문제집을 펴놓고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이 수업 시간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활동이었다. 엄마에게 혼이 나는 건 그저 내가 공부를 못해서, 이해 능력이 달려서, 머리가 나빠서, 멍청해서, 부족한 딸, 모자란 딸이라서. 그렇게 생각했다. 노력하면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혼나지 않는(맞지 않는) 방법이 존재할 거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을 처음 배우는 아이의 관점에서 공부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과 틀리는 건 당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나는 그저 엄마가 잘못된 방식의 과한 체벌과 심한 훈육을 했다고 생각했다. 시대의 반영으로 인해 주변에서도 부모님한테 맞고 자라는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걸 그렇게 심각한 아동 학대라고 생각해야 할까? 하고 생각했다. 다들 그러는 데 나만 유난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엄마는 늘 나에게 유난이다, 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엄마는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쳐서 나를 생각하고 시간을 써서 투자하고 있으니까. 엄마는 나를 굶기지 않고, 새 옷을 사주고,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어쨌든 사랑을 주고 있으니까.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회초리는 그 어떤 물건이라도 손으로 집어들 수 있는 막대기의 형태라면 가능했고, 직접 손으로 집어 들어 그 손 위를 떠나보낼 수 있는 간편한 모든 것이 해당됐다. 후자가 되면서 회초리는 ‘사랑의 매’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형태로 변한다. 어쩌면 ‘무기’,라거나 그저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나는 언젠가부터 본능적으로 주변을 치웠던 것 같다. 회초리 역할을 부여받은 막대기들과, 엄마 손에 잡혀 던져질 가능성이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치워버렸던 것 같다. 추측성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직접 치운 행동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서다. 지금으로써는 급하게 소파 밑으로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을 숨긴다거나 했던 기억만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게 전부다.
하지만 숨긴다고 숨겨봤자 소용이 없다. 화가 난 엄마의 주변에는 물성이 있는 물건이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다. 리모컨, 휴지, 필기구, 문제집, 핸드폰, 지갑, 롤빗. 옷걸이, 숟가락 등등. 그리고…
집에는 과일을 잠시 담아두는 작은 바구니가 있었다. 바구니라고 하기엔 깊진 않고 사과는 한 개만, 귤은 4~5개 정도 들어가는 통이었다. 그날도 엄마는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한 상태였다. 부글거리는 분노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하면서 주변에 손을 휘저으며 던질만한 물건을 찾고 있었다. 그날 내가 놓친 건 탁상 테이블 아래 있던 바구니였다. 그날 거기에는 귤과 과도가 담겨있었다.
던질만한 물건에 탁상테이블이 해당하진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날 엄마는 그 바구니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하나씩 나를 향해 던졌다. 나는 꼼짝없이 날아드는 귤과 칼의 공격을 감내해야 했다.
어떤 기억들은 전후 상황은 기억나지 않고 행위가 일어나는 그 상황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또는 반대로 전후 상황만 기억나고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바구니에 있던 모든 개수의 귤에 맞았던 건 확실한데 칼의 경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귤을 피하려고 앉은 상태로 엉덩이를 뒤로 물러 도망치던 장면에서 기억이 한 번 끊긴다. 그러고 이어진 건 바닥을 짚고 있던 나의 왼쪽 손 바로 옆에,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거리에 칼이 떨어져 있고, 손끝으로 전해진 칼의 스산함이 기억으로 남아있다.
뒤에 한 번 더 나올 이야기라 여기서는 잠깐만 언급하자면 모든 상황이 끝나면 이런 식으로 던져진 각종 물건들을 치워야 하는 건 나였다. 이날도 먼저 자리를 떠난 엄마를 신경 쓸 여력도 없이 터진 귤과 과도를 바구니에 집어넣어 정리를 하고 내방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나는 점점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여 생활 물건을 제거했다. 하지만 그런 짓도 소용은 없었다. 그럴 땐 엄마의 주먹과 손이 모든 걸 해결했다.
엄마는 내가 많이 어릴 땐 적당한 폭력으로 많은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결했겠지만, 내가 내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반항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사용하던 방법이 점점 통하지 않았을 테고, 그걸 느꼈는지 폭력의 수위는 내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갈수록 더 심해졌다.
내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갈 때쯤부터 엄마는 더이상 던질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게 없어도 주먹과 손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의 매라는 의미조차 사라졌다. 체벌이라는 명목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늘 무슨 이유인지 모른 채 혼이 나야 했고, 이유를 알려주어도 늘 앞뒤 맞지 않는 엄마의 말을 해석할 수 없었고, 화가 난 엄마는 왁왁 악쓰듯 소리를 지르며 폭력을 행사했다.
그 외에도 엄마는 머리를 뜯다가 내가 움직이면 “차렷.”이라고 말한다거나, 내 뺨을 때리기 위해 “고개 똑바로 들어.”라고 말한다거나, 회초리로 때릴 때 “피하면 더 다친다.”라고 말을 하거나, “니가 맞을 만해서 때리는 거지.”라고 말을 했다. 그렇게 나는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기 내내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었다.
나는 자라서 스무 살이 되어 20대에 접어들었다. 나의 20대에도 엄마는 여전히 폭력을 사용했다. 이제는 나를 길들여서 손쉽게 나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릴 때와 비교해서 폭력의 빈도만 줄었을 뿐 두들겨 맞는 건 예사였다.
과거를 다시 떠올리면서 엄마의 행동에 관해 이건 아동 학대가 맞고 훈육이 아닌 물리적 폭력이 맞다고 막연히 결론을 내렸다. 결론의 막연함에는 찝찝함도 함께 남아있었다.
나의 모습은 논문에 나오던 피해 아동의 양상과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해도 미묘하게 달랐다. 뭐가 빠진 걸까.
확실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언제 처음 맞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나는 엄마에게 맞기 시작한 이후부터 점점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린아이에게 엄마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일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나의 세상이자 나의 전부인 사람을 미워하느니 나는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나 자신을 죽였다. 엄마를 미워하는 대신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1. 이 글은 독립출판을 염두하고 쓰는 글입니다. 올해 말로 계획하고는 있지만 글을 쓰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계획이 고정되면 공지 예정)
2. 출판을 하게 될 경우, 출판되는 책은 퇴고를 거치면서 내용이 살짝 바뀌거나 수정되거나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대신 연재했던 글은 수정없이 포스타입에 유료로 남겨둡니다.(출판 시 소장 가격 변경+공개 상자 이동 예정/현재 포스타입 소장 100원 고정) / 브런치 스토리의 경우 글이 비공개로 전환될 수도 있습니다.
3. 개인적인 경험을 글로 풀어쓰기로 마음 먹은 만큼 어떤 사건들은 임의로 수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