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통치하는 세계의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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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엄마는 딸을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분신으로 여긴다. 엄마가 원하는 방식 그대로 행동하며 반응하라고 딸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엄마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면 무조건 엄마가 “꼭” 원하는 방식을 찾아 그대로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엄마가 거들떠도 안 봐준다. 그런데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한 방식이란 무엇인가? 자기밖에 모르는 엄마가 제멋대로 만든 원칙 아닌가? 그러나 어린 딸이 이를 알 리가 없고, 더욱 심각한 건 엄마가 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엄마에게서 자란 딸은 자신감 있는 여성으로 성장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과연 제가 엄마 마음에 들 날이 올까요?』 _캐릴 맥브라이드, 오리진하우스)
생활 속 모든 일은 반드시 엄마가 원하는 방식과 순서대로 해야 했다. 언제나 바뀌는 엄마의 마음과 미묘하게 바뀌는 정답에 눈치껏 행동해야 했고, 그 눈치는 언제나 답을 틀렸다. 엄마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하거나, 나에게 말한 적 없으면서 왜 자신이 말한 방식을 기억하지 못하냐고 타박했다. 엄마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기에 답이 틀렸다고 했다. 내가 운 좋게 정답을 맞히더라도 맞히는 순간, 그 답은 그날부터 오답이 되었다. 이상한 이유를 들이밀면서. 정답을 말해도 평생 틀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나는 방을 강박적으로 치웠다. 지금의 나라면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은 행동들. 나는 그때를 떠올리면 우스갯소리로 방을 무균실처럼 썼어. 라고 말할 정도로 머리카락 한 올, 먼지 한 톨 없게끔 방을 유지했다. 그때의 방 전경은 잡화들을 거의 눈에 보이지 않게 서랍에 두거나 방을 바라보았을 때 사각지대에 둬서 가구만 덜렁 보이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독립하기 전까지는 바닥에 머리카락이 한 올만 떨어져 있어도 몸이 뒤틀릴 정도로 신경 쓰이고 그걸 바로 치우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일상생활 중 많은 시간을 써서 방을 쓸고 닦고 했기에, 나는 결벽증이 있고 정리 강박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정말로 내가 깔끔쟁이라서가 아니다. 지금의 내 방은 지저분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다. 내 나름의 방식대로 정리되어 있다고 우길 만큼 너저분하고, ‘아, 방 정리해야 하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엄마는 내 방에 시도 때도 없이 침입해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굴러다니면 방이 더럽고 지저분한 돼지우리라고 온갖 난리를 쳤다. 언제 엄마가 방에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냥 머리카락이든 먼지든 눈에 보이는 족족 치워서 트집잡히지 않게 해야 했다. 머리카락이 단 한 올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사방에 머리카락 천지다.’라고 말하면서 당장 치우라고 방문 앞에 서서 내가 말을 들을 때까지 쳐다봤다. 내가 당장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엄마 눈앞에서 머리카락을 치워야 엄마는 방을 나갔다.
(책상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건 규칙 중 하나였다. 엄마가 내 방에 들어올 때 나는 ‘항상’ ‘언제나’ 책상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어야 했다. 절대로 침대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으면 안 됐다.)
성인 이후로 나의 정신이 슬금슬금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심리적으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하나둘씩 포기하고 내려놓으면서 나는 그냥 혼이 났다. 이전보다 덜 쓸고 닦아서 차라리 방이 더럽다고 욕을 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고 혼이 나거나 아주 사소한 걸로 트집잡혀 혼이 나는 것보다, 차라리 혼나는 이유를 만들어서 진짜 이유로 혼이 나는 게 나았다.
집안일, 평생 답이 없는 숙제였다. 엄마는 집안일에 손가락 하나도 대지 못하게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나를 집안일을 하나도 못 하는 인간 취급을 했다. 그러면서도 부엌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했고, 집안일을 반드시 엄마가 정한 순서대로 하게 했다. 빨래, 청소기 돌리기, 설거지 등이 해당했다.
엄마가 원하는 세탁 코스(표준 세탁 같은 기본 코스가 아닌 엄마만의 코스)를 외워야 했고 그대로 해야 했다. 빨래는 개는 방식도, 수건을 개는 방식도 엄마의 방식대로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는 내가 개어놓은 걸 다 펼쳐서 자신이 보는 눈 앞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엄마의 방식대로 해도 내가 하는 걸 엄마가 보지 못했다면 엄마가 보는 앞에서 처음부터 해줘야 했다.
청소도 설거지도 마찬가지였다. 청소기를 돌릴 때면 왜 거실부터 돌리냐, 왜 니 방부터 돌리냐 등등. 그날의 엄마가 생각한 순서가 진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걸 맞춰야 했다. 설거지를 할 때는 수저와 밥그릇, 각종 접시, 냄비 등 모든 식기류를 씻는 순서와 건조대에 널어두는 방식 등을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나의 바로 옆에 서서 엄마의 크고 높은 목소리로 악쓰듯 쏟아내는 잔소리를 머리가 울리고 귀에 피가 나도록 들어야 했다. ‘왜 그거부터 씻어?’, ‘왜 내가 말한 대로 안 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너는 왜 하라는 대로 안 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내가 우스워?’ 그리고 이런 것들은 유독 나에게만 더 엄격히 적용되는 규칙이었다.
김, 그놈의 김. 전장 김을 자를 때도 늘 답을 틀렸다. 이전에 언급했던 ‘김 사건’보다 훨씬 더 어릴 때. 학창 시절에는 김을 자를 때마다 욕을 먹었다. 3등분으로 자르면 ‘왜 3등분으로 자르냐. 너무 크잖아. 4등분 하라고.’라며 욕을 먹었고, 4등분으로 자르면 ‘왜 4등분으로 잘라? 매번 3등분으로 잘 잘라놓고.’라고 욕을 먹었다.
그러고 꼭 마지막에는 나에게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해? 너 이딴 식으로밖에 못 하면, 사회에 나가서 너 같은 애가 사회 부적응자 되는 거야.”라고 소리 질렀다.
만약 내가 운 좋게 그날 엄마가 원하는 방식대로 했다면 다른 걸로 트집잡혔다. 식탁에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 너무 세게 내려놓았다거나, 그날 엄마가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내가 눈치 안 보고 행동했다거나 하는 이유들로.
나는 성당에 가야 했다. 갔다가 아니라 ‘가야 했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엄마는 내가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할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처음 시작은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5학년쯤이었는지 6학년이었는지 엄마가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엄마가 나와 동생을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한테 혼나기 싫어서 성당을 따라다녔는데, 얼마나 따라다녔을까? 엄마가 나보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내가 할 때까지 세례를 받으라고 닦달했다. 그리고 내가 많이 어렸을 때라 엄마는 적당히 닦달하다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 상황에 나를 몰아넣을 힘이 있었다. 이미 내 이름을 써서 교육을 신청했다고 했다.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집에서 먼 곳으로 또래 친구 하나 없는 곳에 예비자 교리(성당에서 세례를 받기 전 듣는 교육)를 들으러 갔다. 당시에 엄마를 따라갔던 집 근처 성당에서는 어린이 대상의 예비자 교리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먼 길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 듣는 예비자 교리에서는 몇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주요 기도문을 외우는 거였다. 나는 하고 싶지도 않은 활동을 위해 의미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싫었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날그날 지정된 기도서를 외워야 집으로 돌려보내 줬기 때문에 나는 정말 빨리 외워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듯 예비자 교리를 듣고, 중학교 1학년이 될 무렵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을 즘이었는지 거실에 있는 ‘공부 책상’에서 성경 필사를 해야 했다. 하루에 정해진 분량만큼 해야 했고 하고 나면 손과 팔이 아팠다. 그리고 저녁마다 저녁 기도를 했고(몇 번은 아침 기도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나에게도 해야 할 기도 분량을 주었다. 기도 순서에 따라 오늘의 말씀을 읽거나 성경을 읽거나 나눠진 역할에 맞춰 번갈아 말해야 했다. 종종 내가 말의 순서를 놓치거나 잊어버리면 혼이 났다. 그리고 아마 세례를 받기 위한 조건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새벽 미사를 위해 콜택시를 불러서 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지속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세례받을 시기에만 그랬던 건지, 그 이후에도 지속된 활동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세례를 받은 이후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빠질 수 없었고) 매주 미사를 갔다. 엄마와. 가족들과.
가족들과 국내 여행을 가면 그 지역에 성당을 찾아가 주말 미사를 봐야 했고, 해외여행을 갈 때면 주말 이틀이 모두 끼어있지 않도록 해야 했다. 만약 어쩔 수 없게 빠지는 일이 생기면(아주아주 가끔 손에 꼽을 정도로 그런 일이 생기긴 했다) 엄마는 온 가족을 모아놓고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고 닦달하거나, 미사를 빠졌을 때 해야 하는 기도(묵주기도 5단이나, 주님의 기도 33번)를 반드시 해야 했다. 하지 않으면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할 때까지 가족 구성원을 닦달했다.
20대 초반. 일기장에 ‘요샌 식탁에서 기도 안 하면 밥 먹는 것도 막는다.’라고 쓰여 있다.
20대 중반. 성당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두들겨 맞았다. (성당을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게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는데 이날은 맞았다) 그날 나는 두들겨 맞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족들과 다 같이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갔다. 가야 했다.
종교에 관한 건 꽤 오랫동안 관련 활동을 했음에도 기억의 일부를 잘라낸 것처럼 관련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고, 단편적인 기억이 전부이다. 위에 언급한 것만 겨우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너무 일상적이라 여겨서 기억을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가 기억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고.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이비 종교가 아님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나는 대학교 졸업식을 가지 않았다. 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고 학사 가운과 학사모 로망이나 욕심도 없었다. 내가 졸업할 때만 해도 가족 중에 나의 졸업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없었고, 흘러가는 평일 중 하나였다.
시간이 흘러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엄마는 온 가족을 동원하여 동생 졸업식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면서 나에게 “동생한테 가운과 학사모를 빌려서 너도 사진 찍어라.”라고 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봐도 엄마는 같은 말을 반복했고 ‘동생 졸업식은 가족들이 가는데 니 졸업식은 안 갔잖아.’라고 하길래, 나는 내가 대학 졸업식에 가고 싶지 않아서 안 갔고, 가족들이랑 졸업식 기념을 안 해도 괜찮고, 학사 가운과 학사모 사진이 없어도 괜찮다고 전했음에도 엄마는 요지부동이었다. ‘너 대학 졸업식 못 챙겨줘서 미안해서 그러지!’라고 말하면서.
실제 당일에 동생의 졸업식 사진을 찍으려고 학교 곳곳의 예쁜 장소를 돌아다녔는데, 엄마는 계속해서 나에게 학사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동생에게 ‘언니한테 가운이랑 학사모 줘라.’라고 절대 말하지 않고 옆에 듣고 있던 동생이 가운과 학사모를 벗어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엄마의 말과 행동은 동생이 학사 가운과 학사모를 나에게 넘겨주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나와 동생은 이런 상황을 평생 겪었기에, 엄마가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자연스럽게 알았다. 동생과 눈이 마주친 나는 ‘그냥 빨리하고 끝내자.’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했는지 가운과 학사모를 넘겨주었다. 적당한 장소를 찾던 엄마는 ‘여기서 찍자’라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엄마는 직접 사진을 찍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동생이었다. 그렇게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나는 내 졸업식도 아닌데 동생의 학사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그날 졸업하는 사람처럼 독사진을 찍게 되었다. 출차주의등이 바로 뒤에 보이고, 왼쪽엔 지상에 주차된 차량이 있고, 오른쪽엔 추운 계절로 노랗게 말라비틀어진 덤불 잎사귀 배경의 계단 위에서.
이런 것들이 하나둘 모여 나의 모든 생활에 엄마의 손이 뻗쳐왔다. 일상생활 속 나의 모든 행동이 때때마다 달라지는 엄마의 규칙대로 행해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삶에서 ‘다음’이라는 게 없었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 상황에 영원히 갇히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나 행동을 상대가 들어줄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심리적 압박을 줘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
가끔은 사랑을 볼모로 삼았다. 엄마의 욕구를 채워줘야만 받을 수 있는 조건적 사랑이라도 받기 위해 어린 나는 부단히 애썼다. 점점 자라면서는 그저 엄마가 나에게 똑같은 말을 하는 상황에 갇히거나, 엄마가 원하는 대로 안 해줬을 때 겪는 다양한 상황에 갇히지 않기 위해 엄마의 말을 들어주었다. 들어주어야 했다.
영영 ‘다음’이 없는 시간 속에 갇히긴 싫었으니까.
1. 이 글은 독립출판을 염두하고 쓰는 글입니다. 올해 말로 계획하고는 있지만 글을 쓰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계획이 고정되면 공지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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