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미안하지만 쏘니 유니폼은 사줄 수 없구나

by 현 Hyeon

[8살 아들과의 축구 에세이]


“아빠, 나도 저거 사줘”


“뭐? 아 저거… 저건 안 돼“


“왜 안 돼?! 나도 저거 갖고 싶어. 저거 갖고 있는 애들 많단 말이야” (눈물)


“음… 그래도 안 돼. 차라리 다른 걸 사줄게”


어느 날 아들과의 대화였다. 외동이기도 하고,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매번 떼쓰는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원하는 게 있으면 보통은 사주곤 한다. 하지만 저때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13년부터 아스날이라는 팀을 응원해 왔다. 계기는 13/14 시즌의 잭 윌셔라는 선수의 노리치전 골이었다. 아스날은 특유의 패스 앤 무브로 얘기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팀워크의 축구로 잘 알려져 있다.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와도 다르고, 레알마드리드 등 강팀에서 볼 수 있는 시원시원하고 힘 있는 축구와도 성격이 다르다. 아르센 벵거의 섬세하고 창의력 넘치는 당시 아스날의 축구는 아트 사커라고도 불렸다. 특히 노리치전에서 서너 명의 선수가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팀을 꼼짝 못 하게 만든 그 골은 대학생이었던 나를 매료시키게 충분했다.


아스날은 이미 프리미어리그에서 전무후무한. 무패우승으로 유명했다. 베르캄프, 티에리 앙리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속해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도 무덤덤했던 나는 2013년 내 눈으로 확인한 아름다운 ‘축구 한방’에 응원팀을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2025년까지 지속되었으니 10년 넘게 팬심을 유지해 온 셈이다.


그런데 아스날 팬으로서 한 가지 맞닥뜨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손흥민의 존재였다. 한국인으로서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득점왕까지 차지한 손흥민이, 다름 아닌 아스날의 더비(지역 라이벌) 팀인 토트넘 소속인 것이다. 손흥민 덕분에 토트넘 팬으로 유입된 한국인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손흥민이 매우 준수한 활약을 해오면서 축구 기사나 여론도 토트넘 친화적으로 전개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아스날은 물리쳐야 할 팀이 되었다. 마치 영웅의 서사를 가로막는 빌런 같은 존재처럼.


손흥민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스날을 더 응원한다. 축구 클럽 유니폼들을 여러 장 갖고 있는데 토트넘 유니폼은 없다. 아니 살 수 없다. 라이벌 의식 때문에 맨유도 리버풀도 첼시도 뉴캐슬도 안 사는데 어떻게 토트넘을 사겠는가. 황희찬의 울브스, 이강인의 파리, 배준호의 스토크 유니폼은 있지만 손흥민은 없다.


Gemini_Generated_Image_38ml4o38ml4o38ml.png AI가 그려준 그 날 엘리베이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은 라인에 사는 친구가 4살 아들과 같이 탔다. 8살 형아인 우리 아들도 그 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데, 그 4살짜리가 손흥민의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등번호 7번 SON. 공교롭게도(?) 거울에 비친 손흥민 마킹이 그날따라 유독 잘 보였고, 아들은 그 자리에서 그걸 사달라고 얘기했다. 자기네 반에도 저 유니폼 입고 있는 친구들 많다면서.


저건 안 돼. 너도 유니폼 많잖아. 빨간색(아스날 홈), 파란색(아스날 어웨이)…
그게 더 이쁘고 좋은 거야


나는 애써 그렇게 얘기해 봤지만, 아들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나도 SON 갖고 싶다면서 말이다. 같이 탔던 내 친구는 아스날-토트넘 배경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내 아들을 달래며 아빠는 저거 사주기 어려울 거라며, 웃으며 이 상황을 즐겼다. 참으로 난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집에 와서 고민했다. 아들은 아스날 팬도 아닌데 그냥 사줄까? 아냐, 한두 푼도 아닌데 그걸 입고 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 국대 유니폼을 사줄까? 앗, 국대 유니폼엔 SON이 아니라 HEUNGMIN이라고 적혀있네. 아들에겐 언젠가 사주겠다고 맘에 없는 약속을 하고는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겠지 하고 넘겼다. 다행히(?) 그 뒤로 다시 얘기를 꺼내는 날은 없었다.


이런 내게 들려온 희소식이 있었으니, 손흥민이 토트넘을 떠나 미국의 프로리그 LAFC로 이적한다는 것이었다. 토트넘 레전드로 남은 그가 영국을 떠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손흥민 유니폼을 사줄까 고민했던 내겐 너무나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게다가 LAFC 유니폼은 이뻤다. 홈은 검은 바탕의 골드, 어웨이는 흰색 바탕의 골드였다. 바로 저거다!


게다가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바로 얼마 전에 LAFC 유니폼이 한국에 정식 발매됐다! 그동안 저 유니폼을 사려면 해외 사이트를 통해 직구를 해야 했는데 그 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한국 정식 발매라니! 비록 홈이 아닌 어웨이만 발매가 되었지만, 등에 SON 7번이 적힌 유니폼을 쉽게, 그리고 당당히 사줄 수 있어 정말 기뻤다.


한편으론, 어쭙잖은 팬심 때문에 아들이 원하는 걸 사주지 않는 내가 철없게도 느껴졌다. 그런데 이것도 팬심의 일부이고, 축구의 일부 아니겠나. 아들도 언젠가 아빠의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고 믿는다. 나중에 아스날 유니폼을 같이 입고 런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아스날 경기를 보자고 한 번 더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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