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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옥 Nov 01. 2020

생각의 힘

엄마와 나

 나는 생각의 힘을 믿는다. 유명한 일화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냉동탑차에 실수로 갇힌 한 청년이 다음 날 아침 동사한 채로 발견되었는데, 사실 그 냉동탑차는 가동되고 있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이다. 청년은 가동되지 않고 있는 냉동탑차 안에서 이 곳은 냉동실 안이라는 스스로의 생각 하나만으로 얼어죽었다는 것이다. 실화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생각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학창시절, 나는 교회를 다녔다. 중학교가 미션스쿨이기도 했고, 친구들도 모두 교회를 다녔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다니게 되었다. 가족 중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나 뿐이었고,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었다. 엄마는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공부할 시간을 쓸데없이 교회에 뺏긴다며 주일만 다가오면 교회 가는 것으로 항상 싸웠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면 그 일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숨어서 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나는 일요일마다 학교 간다며 교복을 입고 나가서 밖에서 사복으로 갈아입는 등 엄마 몰래 계속 교회를 다녔다. 교회 얘기를 하는 것은 ‘힘들었던 시절 하나님이 도움이 되었다’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행위가 곧 마인드 컨트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와서 어느새 ‘화석’이라 불리는 학번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공모전 수상처럼 기분 좋고 뿌듯한 일도 많았지만 친구를 잃고, 원하던 목표 앞에서 좌절하는 속상한 일들도 당연히 있었다. 그런 경험들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모자람을 깨닫고 인격적으로 더욱 성장하길 원했다. 그리고 정말 도움이 된 것이 바로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자기 전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떠올렸다. 쿨하고, 인정 많고, 여유롭고, 뒤 끝 없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난 실제로 전혀 쿨하거나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생각할 수록 나는 점점 그렇게 되어갔다. 힘든 일이 있어도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고, 나는 나에게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신이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의 힘으로,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잠시 짧으면서도 긴 얘기를 했다. 다시 교회 얘기로 돌아가자. 두 손을 모으고, 방언을 터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엄마를 이해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쓰고 나니 너무 착한 척 하는 것 같아서 좀 재수없게 느껴지긴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기도했다. 나는 엄마를 미워했고, 증오했고, 대화조차 하기 싫어했다. 엄마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게 꼴보기가 싫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한 여자로서의 엄마의 삶이 너무 불쌍했다. 엄마를 미워했지만 사실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친해지고 싶었다.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다른 아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기도했다.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뤄지지 않을 것 같던 기도는 결국 이뤄졌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나는 이것 역시 생각의 힘이 해냈다고 느낀다.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결국 나 자신에게 영향을 주어 스스로 노력했기에 현재는 엄마와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신앙심이 없어졌다기보다는, 변명이긴 하지만 타지역으로 대학을 오니 일요일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어쩌면 이제 어지러웠던 마음속이 진정되어서 더 이상 교회에 목매달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상처 받았던 과거를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 그 당시 내게 상처주었던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나의 고통의 원인으로 엄마를 지목하고 원망하던 때도 있었지만, 미움은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엄마를 미워할수록 나는 이런 가정에서 자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고 가엾게 생각했다. 가족을 싫어한다는 것은 내게 어떠한 긍정적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엄마 없어도 너네 잘 살 수 있어? 한 달에 한 번 보러 올게.”


 몇 살인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아마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날 저녁부터 갑자기 열이 오르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일찍 잠에 들었는데, 몇 시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 새벽에 누군가 날 흔들어 깨웠다. 날 깨운 건 엄마였다. 엄마는 나와 여동생을 작은 방으로 불러모았다. 남동생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방을 제외한 집 안 전체의 불은 다 꺼져있었다. 나는 아픈 것도 잊고 왠지 모를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고, 엄마는 입을 열었다.


 도망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 없어도 잘 살 수 있냐고. 동생들 잘 챙기면서 지내고 있으면 한 달에 한 번 보러 오겠다고, 그럴 수 있겠냐고 했다. 엄마는 울었다. 소리내서 울진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엄마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일 뿐. 엄마의 몸에 손이 닿는 것이 어색했다. 나는 어색하게 굳은 채로 엄마의 어깨를 문질렀다.


 엄마는 도망가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많고 뻑하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엄마였지만 그래도 엄마는 결국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풀리지 않는 사업, 증오스러운 남편, 챙겨야하는 자식들. 얼마나 깜깜했을까. 내게 그 날 밤이 잊혀지지 않듯이, 엄마도 그 날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해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과거의 상처를 앞세워 엄마를 마냥 미워하기에는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울컥울컥 비치는 엄마의 고통이 기억 속에 너무도 선명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쿨하고, 인정많고, 여유롭고, 뒤 끝 없고……. 과거를 완전히 잊을 순 없겠지만, 기억의 저편으로 던져 놓으려 한다. 그리고 쿨하고, 인정많고, 여유롭고, 뒤끝 없는 내가 되기 위해 엄마를 용서해야지. 그리고 이해해야지. 학창시절 다니던 교회에서 항상 얘기했던 것처럼,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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