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ther Mar 13. 2019

영화 <중경삼림 (1994)> 리뷰

시간과 사랑의 단절을 극복하는 공간의 연속성

왕가위의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미지요 아이콘인 것 같다 (어쩌면 감독의 이름 자체가!). ‘그 시절의 홍콩’이라는 경험하지 못했던 사실에,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부르는 영화가 어디 흔하던가? 심지어 감독은 친절하게 쇼트와 쇼트를 메워주고, 서사를 매끄럽게 이어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영화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때로는 색으로, 때로는 심상으로, 때로는 음악으로. 


왜 <중경삼림>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이 영화가 발견한, 무수한 단절이 빚어내는 공백의 가치 때문이라고. 따라서 나는 <중경삼림>을, 굳이 배경지식을 찾지 않아도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물론 영화를 깊게 이해하고 싶다거나, 다양한 의미를 탐구하고 싶다면 <중경삼림>만큼 깊이 있게 파고들만한 영화 역시 흔치 않으리라.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는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던 시기와 맞물리며, 영화 속엔 당대의 사회상을 읽어낼 수 있는 흔적들이 숨어 있다. 심지어 감독 특유의 촬영 기법까지 찾다 보면 우린 분명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신선놀음을 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금 말하고 싶다. 가볍게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영화 속 여백에 우리가 몸을 누일 공간이 이미 충분하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적지 않으니까.


어쨌든 이 영화는 멜로/로맨스 장르로 분류되지만 기존의 로맨스와는 분명 다르다. <중경삼림>은 사랑을 그린다기보단, 기실, 수많은 ‘단절’을 그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짧게 덧붙인다. 사랑은 연속성 위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오로지, 일 만년으로 길어질 수 있을 만큼의 하염없는 순정과 스쳐 지나가는 행인 속에서 멈춰 설 줄 아는 기다림 속에서만.


시간적  인과가 아니라 공간적 동일성으로 맞닿은 두 개의 분할된 에피소드를 하나의 영화에 담아낸 것이 어쩌면 그 출발점일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음에도 <아가씨 (2016)>나 <더 페이버릿 (2018)>처럼 그 챕터를 완연히 나누지도 않는다.  – 사실, 그렇게 ‘번호 매겨진 것’은 이 영화 속에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 이 영화는 다만 시간적으로 분절되어 있고, 그저 그럴 뿐이다. 


“거기서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치던 순간에는 서로의 거리가 0.01cm 밖에 안 되었다.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시계를 보여주는 쇼트는 초침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아날로그 시계를 비추지 않는다. 일 분이 지나면 무심히 철컥, 숫자가 바뀌며 하지무/경찰 223(금성무)은 그러한 숫자들 사이에 자신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통조림에 갇힌 것은 파인애플이나 전 애인 메이의 기호 따위가 아니다. 그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하지무는, 결국 본인이 고백하듯, 메이에게 그는 파인애플 통조림과 별 다를 바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이 숫자로 구획 지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으니까. 이것은 어수룩하고도 서투른 사랑방식처럼 애틋해 보일지 몰라도 최소한 왕가위의 <중경삼림> 속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하지무의 사랑은 자꾸만 빗나가고 엇나가며 실패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가장 큰 줄기, 하지무와 마약 딜러(임청하)의 관계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물론 하지무는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고 자기 충족적 예언 비슷한 것을 한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지지도 않았을뿐더러,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저 223은 5년간 함께했던 ‘메이’를 잊기 위해 하나의 수단으로 달려갔고 이 바에 들어오는 첫 번째 여성을 사랑하기로 다짐했을 뿐이다. 사랑은 다짐으로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사랑을 잊는 데에 지리한 한 달을 보낸 남자가 몇 초만의 결심으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무가 만난 사람이 다른 이였다면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약 딜러와 맺는 관계는 사랑일 수가 없다. 둘은 태생적으로 어긋난 사이다. 한 명은 갇혀있고 한 명은 인간의 변질을 신봉한다. 두 사람이 서로의 신분을 교환하지 않았음에도, 불확실성 속에서 자꾸만 달리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소심한 인물이라는 분명한 접점마저 있는데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진다.


경찰 223의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정체성이 떠돌이에 가까운데도 스스로가 제한된 공간에 밀어 넣는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그는 홍콩이라는 다문화 사회 속에서 수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혼종적 정체성을 지녔다. 그러나 스스로를 번호 속으로 몰아넣고,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 스스로를 구겨 넣는다. 예컨대 이런 씬들. 바에 들어와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금발의 마약 딜러에게 여자들이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에 대해 단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하는 모습, 인생 전반의 25%를 살아낸 어느 생일에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 말하는 씬, 6개월 만에 누군가를 체포했다는 설명 등.


어디 그뿐인가? 실연을 잊는 데엔 조깅이 아주 좋은 수단이라고 말하며 하지무는 눈물 대신 땀을 흘리는 것을 예찬하듯 변명하지만, 그의 행위가 ‘달리기’가 아니라 ‘조깅’인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실연했을 때조차 그의 움직임은 운동장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갇혀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을 전전하고, 223이라는 암호 같은 이름 뒤에 숨은 사복 경찰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유통기한이 동일한 통조림을 사 모으는 일탈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추측은 자꾸만 무너진다. 떠도는 남자가 갇혀 있으려 하니 그의 모든 시도는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마약 딜러가 선글라스를 쓴 이유는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사항에 전혀 들어맞지 않고, 바bar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을 좋아할 것 같다는 예감을 품었으나 정 반대의 상황을 마주한다.


두 사람이 함께 호텔에 들어갔을 때 하지무는 넥타이로 마약 딜러의 구두를 닦아준다. 호텔방에서 어머니가 알려준 매너를 실천할 만큼의 용기,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사소한 매너를 실천하는 용기는 있을지언정 침대 위에 잠든 여인의 선글라스를 벗길 만큼의 용기가 없는 남자에게 사랑은 찾아오지 않았다. 구두를 닦아 주면서도 삐딱하게 세워둘 뿐인 남자에게 찾아온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는 다만 짧은 일탈이 주는 미련이었고 평생을 안고 갈 기억의 편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공간, 다른 시간. 삐삐가 아니었더라면 그 미련조차 서로는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까.


"8시엔 붐빌 것 같아서……. 7시 15분에 도착했죠."


영화는 또 다른 남자, 경찰 663(양조위)을 비춘다. 이 역시 실연을 겪은 남성이며, 직업 역시 경찰이다. 그의 이름 역시 특별히 제시되지 않으며 Mr. 663이라는 괴이한 코드로 불리곤 한다. 홍콩이라는 도심 속에서 그의 얼굴과 자주 사가는 음식 등이 이럭저럭 알려져 있으나 패스트푸드점 주인에겐 그저 Midnight Express에 자주 들리는 한 명의 손님일 뿐이기도 하다. 적당한 무관심 속의 객체이나, 편지를 열어보고자 하는 사사로운 호기심이 끼어들 수 있는, 그 정도의 이방인. 여기까진 하지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아주 거대한 차이가 있다. 바로 663이 시간을 강박적으로 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시간을 감각한다. 그리고 뛰어간다. 그것은 663이 223과 다르게 실패했던 사랑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녀가 왔다는 예감'은, "2분 전 6시"나 "57시간"과 같은 특별한 수식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왕가위가 원하는 시간이란 이런 것이다. 감각적이지만 너무나도 명확한 때. 제 때 찾아왔다고 안도할 수 있는 어떠한 시점.


223과 마약 딜러의 사이를 가로질렀던 감정적 장벽은 마약 딜러의 선글라스로 상징된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내리지 않고 하지무는 그의 선글라스를 감히 벗기지 못한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의 단절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음악으로 둔갑한다. California Dreaming은 너무나도 큰 소음처럼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때로 음악을 끄고, 음악을 선물하거나 되돌려줄 줄 아는 사이로 발전한다. 


노래는 감정적 분절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인물을 설정하는 소품이기도 하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몽중인'과 'California Dreaming'은 모두 꿈과 관련되어 있다. 페이(왕페이)는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인물이다. 직종을 끊임없이 바꾸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종국에는 스튜어디스라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는 것처럼, 그녀의 달리기엔 명확한 끝이 없다. 이러한 인물에 대해 경찰 663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자신의 집에 숨어들었던 페이를 향해, 특별히 강박적으로 시간을 재지 않고서, 그러나 가장 정확한 ‘제 때’ 달려 나갔던 그는 기다림으로 승부를 겨룬다. 숫자로 또렷하게 조각된 시간과 약속된 장소는 그들에게 사랑을 안겨주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8시’라는 명확한 지표에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명확한 약속 없이 지속된 기다림, 순간의 영원을 믿으며 기다린 663의 결말은 223과 달랐다.


왕가위의 영화는 한 권의 소설책이라기보단 그림이나 시처럼 느껴진다. 불친절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을 내쫓는다기 보단 차라리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명확한 지향점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지로 전달되는 주제, 모호성 속의 감흥, 대담하게 삽입되는 음악.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향유할 것이 많아짐에도 그것을 굳이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마저 사랑스럽다. 나는 이 영화의 세련되고도 우아한 미학이 마음에 든다.



★★★★☆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파이팅 위드 마이 패밀리 (2019)>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