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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Nov 17. 2020

영화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 리뷰

아이는 날 것 자체인 마음을 바라보고, 기억하며 자라난다


최근 자기 전에 영화를 보는 습관을 들였더니, 비교적 서사 구조가 단순하고 가벼운 영화를 찾게 되었다. 하지만 오로지 이 이유가, 내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사랑하게 된 까닭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전체 관람가 영화를 선호한다. 그저 독해가 쉽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대상 연령층이 어리다 하더라도 철학적인 작품은 대단히 많다) 말초적 자극을 지양하면서도 사회가 꿈꾸고 바람직하다 여기는 주제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자. 신경 말단을 자극하는 장면들이 정말 그토록 자주 필요한지. 수위가 높아지는 언어적, 육체적 표현 없이도 어린 우리가 품었던 소우주는 이미 그 시절에 완전했다. 빨간 제라늄 화분이 놓인 집은 그 자체로 영롱한 꿈의 집이 아니었나.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소년 맥스의 일상적 불행과 시작한다. 소중하게 만든 이글루가 무심하게 무너지거나, 하나뿐인 누나가 자신이 아닌 친구들을 선택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아이의 절망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학대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성장은 자신의 에고를 성립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지만, 그 에고를 마땅히 무너뜨리고 타인과 융화되는 과정 역시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창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미성숙한 소년에겐 이 사실이 어렵다.


맥스가 원하는 만큼의 무조건적인 애정이 항상 뒤따라 오는 것은 안타깝지만 불가능하다. '항상', '완벽하게' 따위는 개념적인 수식어일 뿐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지만, 맥스는 그것을 납득할 만큼 자라진 못한 상태다. 더군다나 하나뿐인 누나도 동생을 돌보기보단 친구들과 놀고 싶은 나이이니 소년의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은 온갖 군데로 튀어나가기 마련이다. 누나를 향한 분노는 누나의 공간을 부수고 눈물로 녹여내는 데에서 그쳤으나 그 이면엔 어머니의 애정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어머니를 향한 분노는 그저 솟구치기만 한다. 통제할 외부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맥스는 어머니를 깨물고 집 밖으로 달려나간다. 소년의 달리기는 언뜻 해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장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목적지가 없는 달리기는 어디서 멈추게 될까? 현실적으로는 체력이 다하는 순간, 일 것이다. 외부적으로 설정된 값이 없을 땐 내적 파멸이 스스로를 멈춰 세우기 마련이므로.


운이 좋게도 맥스는 체력을 소진하기 전에 환상세계에 도착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말이다. 이곳은 왕이 존재한 적이 이따금 있었다는 점에서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법 체계 등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지리적 요건에 따라 '섬'이라고 명명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오묘한 환상세계는 규칙 없음과 약간의 상식이 뒤죽박죽 섞여있으며, 서로에게 느슨하기 짝이 없는 연대의식을 지닌, 외부자를 경계하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이 장소가 맥스의 무의식적 심리 체계를 반영했다는 것을 짐작하는 점은 어렵지 않으나,  괴물들이 저마다의 우울 증세를 품은 듯 보이는 점은 분명 독특하다. 특히 건강한 소통 행위로 감정 표현이 이루어지는 점이 드문 점은 주목할 만하다. 디즈니의 <인사이드 아웃(2015)>을 떠올려보자.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등장하는 괴물들의 이름은 슬픔이, 기쁨이 등의 이해할 수 있는 감정 명사가 아니며 관객은 괴물들 사이의 긴 반목의 명확한 유래를 짐작할 수 없다. 괴물들과 맥스는 서로에게 소유된 관계가 아닌, 어쩌다 알게 된 다른 세계의 타인이다. 괴물들은, 그러하므로, 맥스에게 왕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였음에도 평등한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고유의 이름을 보존할 수 있고, 통제 불능의 방식으로 행동한다. (분노는 폭력으로, 공포와 사랑 모두 상대를 잡아먹겠다는 원초적 행동으로 귀결된다.) 이들에게 지혜를 구하는 올빼미가 있고, 행복을 꿈꾸며 만들었던 모형이 있다 해도 말이다. 맥스는 그들의 시간 일부에 잠시 동행하였던 승객일 뿐이다. 


괴물 중 짚어내고 싶은 이는 바로 캐롤이다. 맥스는 캐롤의 행동을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자신이 겹쳐보인다는 이유로 도우며 관계를 맺었다. 이후로 이 미묘한 연대는 지속된다. 맥스가 왕이라는 환상을 순수하게 진실로 받아들이고 요새를 짓겠다는 맥스의 의견에 동의하던 그의 모습은 두 인물의 거리가 좁아지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그 최고점에 올빼미가 있다. 남은 이들은 모두 올빼미의 말을 이해하나 맥스와 캐롤은 문명화된 언어로 듣지 못하므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소외감은 사실 외부 세계의 반전 그 자체다. 맥스의 슬픔과 분노는 오로지 맥스만의 자연적인 울림이고 문명화된 언어로 통역되기 전까진 타인과 소통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어떤 번역을 거치더라도 자신만의 온전한 감정은 사실 그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느껴질 수 없다. 맥스가 캐롤을 만난 이 환상적인 기적속에서만 간신히 유사함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맥스가 배운 것은 그런 것이다. 거대한 슬픔과 고독 따위를 막아낼 방패가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맥스에겐 그런 것이 없으며, 어떤 요새를 막더라도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 타인에게 비호감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하더라도 항상 그런 인물은 아니라는 것과, 분노는 전쟁놀이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 따위. 소년이 제안하는 '놀이'는 당장의 화를 누그러뜨릴 순 있었지만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캐롤과 맥스가 잠시 멀어졌던 때를 되짚어야 한다. 캐롤에게 맥스가 왕이 아닌 일반적인 소년임을 알려줄 때 둘은 멀어진다. 환상에만 의지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놀이는 신기루다. 지금의 감정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눈을 떼게하는 소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영원히 나의 감정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캐롤과 맥스의 울음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던 순간 달려왔던 맥스는 배를 타고 떠난다. 섬은 더이상 현실 세계와 이어진 공간이 아니다. 배를 타고 접근할 수 있는 고립된 공간이 된다.


이야기는 맥스가 현실로 돌아오며 끝난다. 나는 이 이야기가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기본적인 서사구조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 사실 환상 세계로 진입하는 동화는 서사 구조가 크게 다르기 어렵지만 말이다 -. 세계는 아이를 삼키지만, 아이는 성장한 후 세계를 찢어내며 되태어난다. 그러하므로 맥스의 여정이 마무리 될 즈음 KW가 맥스에게 했던 말, '너를 잡아먹을 만큼 사랑해'는 이해할 수 없지만,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된다. 돌아온 맥스는 어머니의 애정을 받아들이되 갈급해하진 않는, 그녀가 자신 앞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여도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소년이 되었다.


환상세계는 앨리스가 머물렀던 이상한 나라처럼 꿈이었을까?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2016)>에 존재하는 숨은 공간처럼 현실적인 장소였을까? 당연하지만, 영화는 그 지점을 집중 조망하지 않는다. 맥스는 괴물들과 함께 하던 초반, 캐롤의 분노를 이해한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영화 초반 시퀀스가 보여준 맥스의 비이성적 행동엔 어떤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던 걸까? 자신만의 이글루가 무너져 엉엉 울었던 아이, 다시 방 안에 포트리스를 지었던 아이는 자신만을 소중하게 여겨줄 공간과 어른이 사라질까 두려웠던 것이리라. 환상세계의 경험을 통해 행복은 항상 최고로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은 덕분에약간의 흔들림만으로 자신이 버림받을지 모른다고 믿던 연약하고도 본능적인 두려움은 해소되었다. 앞으로 슬픔과 우울, 고독을 무찌르고 소년을 보호해야 할 물리적인 방패(요새)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성장한 내면(기억)이 새로이 자리했으므로. 앞으로 더 크고 위협적인일들이 소년을 무너뜨리기 위해 몇 번이고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그 거대한 미래는 지금으로부터 너무나 멀어 마치 하늘의 태양과도 같다. 언젠가 찾아올  태양의 소멸을 상상해 볼 순 있겠으나, 지금 당장부터 우려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제 맥스는 괴물들이 사는 섬을 찾아갈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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