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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pr 11. 2021

영화 <모노노케 히메(1997)> 리뷰

네가 나를 파멸로 이끈다 하여도, 나는 너를 살릴 것이다


한 세대 이상을 뛰어넘는 예술엔 이상한 마력이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모노노케 히메> 역시 그런 작품에 속한다. 다각도의 신념을 지닌 인물 군상이 등장하고, 여기서 빚어내는 작은 마찰음부터 문명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갈등을 담아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더불어 재앙 직전의 순간마다 피어오르는 찬란하고 작은 불꽃을 놓치지 않기까지 했으니 두말하여 무엇하랴. 잊고 살다가도 이따금, <모노노케 히메>가 그리워지는 날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은 꽤 특수하다. 일본 토착 신앙을 내재화한 에미시 일족에서 출발하는 것은 물론, 재앙신이라는 개념이 당연하다는 듯 등장하는 것이 그 예시다. 그러나 아시타카의 행적은 지극히 보편적인 영웅 서사의 기본 틀을 따른다.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화살을 쏘고, 이 고귀한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저주를 받아들이며 기존의 공간을 떠나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제대로 된 배웅도 허락되지 못한 출발이었으나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아시타카의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행운은 우연히 찾아오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이 행한 선행의 대가로서 먼 길을 돌아오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시타카는 지코를 돕고, 지코는 그에게 생명의 숲을 알려준다. 아시타카는 이 과정에서 에보시의 제철장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데, 숲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어찌 보면 아시타카는 문명과 자연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외지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그는 모로 일족과 에보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불분명한 신분의 제삼자가 되고,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자연의 측면에서 일방적으로 인간의 생활을 비난하지 않고, 인간의 시선만으로 자연을 도구화하지 않게 되도록 아시타카를 주요 인물로 삼은 통찰력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모노노케 히메>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흥미롭지 않은 인물이 없다. 자연을 공격하는 에보시는 풍요로운 공동체와 난치병을 앓는 이를 돕고자 한다. 숲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그의 동기를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 세계에서 버림받은 산이 모로 일족에 동화되어 자신의 유일한 터전을 공격하려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걸 마냥 악하게 여기고 영원히 구별이라는 낙인을 찍어야만 하는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 내에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사슴 신을 꼽고 싶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격화된 신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사슴 신은 오로지 경탄만을 바치고픈 신비의 존재라기보다는, 소통이 어려운 미지의 대상이며 두려움을 자아내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대한 능력을 지녔고, 생명을 부여할 권능과 거두어갈 힘이 있는 대상. 신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으나 미련 없이 추앙하기에는 어렵다. 아마도 다이다라봇치로 변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섬뜩함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가 하고픈 말은 무엇이었을까?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속에서 부단히 타협점을 찾으려는 아시타카의 노력을 본받으라는 것일까? 일부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전하고픈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산을 대하는 아시타카의 태도를 고려해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산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순간에 아시타카는 말한다. "살아라, 그대는 아름다워."


우리는 아시타카의 노력을 쫓으며 수많은 생명의 분투를 보았다.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모르면서도 최선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 -비록 오판을 하더라도- 넉넉한 품을 내어주는 지도자들을 보았다. 인간들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결국 인간을 살리는 시시가미 또한 보았다. 그러하므로 모노노케 히메는 하나의 생명 찬가처럼 비친다. 내가 비록 너로 하여금 멸망한다 하여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너를 아름답지 않다 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산과 아시타카가 이끌어낸 결말은 흔히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쪽이 다른 쪽에 흡수되어 융화되는 결말이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산은 여전히 인간과의 공존이 아닌 숲을 선택했고, 아시타카는 타타라바에서 살며 산을 만나러 갈 것을 약속했다. 각자가 이행할 수 있는 평행적 삶의 방식은 승리와 패배를 통해 반드시 하나로 합치될 필요가 없다는 걸 우리는 왜 모르고 살았을까? 평행선 사이에 직선을 긋는다면 우린 언제든 평화롭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깨지지 않는 한 영원히 유효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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