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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r 27. 2019

영화 <판의 미로(2006)> 리뷰

소녀가 손에 쥘 수 있던 것은 오로지 가사 없는 자장가뿐

영화 <판의 미로>가 개봉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맞는지, 그동안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스페인을 넘어 전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다. 델 토로의 전작을 살펴보고자 하는 팬들이 늘었기 때문일까? 한국에선 아동 판타지로 소개되어 흥행을 하지 못했다는 이 영화를 향해 고개를 돌린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판의 미로>는 1944년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다크 판타지 영화로, 델 토로 감독 특유의 어둡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 동화라 소개할 수 있겠다. 비록 무시무시한 장면이 여럿 등장하긴 하지만.


본작의 주인공은 어린 오필리어(이바나 바케로)이다. 소녀의 이름은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오필리어에서 따왔거나, 최소한 그의 이미지에 어느 정도 빚진 구석이 있을 거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에서 오필리어가 무참히 쓰러져 피 흘리는 모습은 존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어'를 일견 연상시키기도 한다. 감독은 소녀의 시선을 따라간다. 현실과 환상 사이를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스페인 내전의 잔혹함이나 파시스트 정권의 무참한 폭력 따위를 고발하기도 하지만, 파괴 속에서 회복될 수 있을 순수의 가능성에 대해 물음표를 찍기도 한다.


<판의 미로>는 참으로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영화이다. 나온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영화이기 때문에 양질의 리뷰도 이미 충분하며 논문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여전히 살아 있는 텍스트이자 다시금 보아야 하는 텍스트이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이 영화가 여전히 흥미로운 까닭은, 영화를 볼 때마다 새로이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영화를 대하는 나의 시선 그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짧은 간격을 두고 재관람을 하더라도 매번 나의 시선을 잡아 끄는 요소가 변한다. 처음엔 이 기괴한 스토리가 어쩐지 신경 쓰였고, 다시 볼 땐 메르세데스라는 캐릭터에 매료된 적도 있었으며, 언젠가는 오필리어와 달 사이의 관계성이 궁금해진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이번에는 영화의 제목이 문득 궁금해졌다. 델 토로 감독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스페인 내전과 조금도 관계가 없는 이 제목, 오필리어의 이름조차 따지 않은 이 중립적인 제목을 내세운 이유는 대체 무얼까?



먼저 정확히 살펴보자면, <판의 미로>의 스페인어 원제는 <El laberinto del fauno>이다. 스페인어 'Laberinto'에는 엄연히 '미로'와 '미궁'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하기에 <판의 미로>라는 한국어 제목이  잘못된 것이라 하긴 어렵다. 그러나 영어권 국가에서 <Pan's Labyrinth>로 번역되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언어적 유사성만 따져도 제목을 'Maze'가 아닌 'Labyrinth'로 번역되는 것이 옳은 결정이겠지만, 여하튼 나는 영어로 번역된 제목이 이 영화에 보다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는 지하세계로 통과할 수 있는 문이라는 '중심점'을 향해, 복잡하게 마련된 미로를 통과하여 도착하는 곳, 즉 미궁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대단히 전형적인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마치 동화책을 펼치기라도 한 듯, 지하세계에 살고 있던 공주가 푸른 하늘과 햇빛을 열망하여 고향을 저버렸다는 이야기가 느릿하게 흘러나온다. 하지만 인어공주처럼 제 세상을 벗어난 공주는 해피 엔딩을 맞이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눈부신 햇빛 아래서 공주는 기억을 잃었고,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왕은 공주를 기다리기로 한다. 기억을 잃은 공주의 영혼을 위해 왕이 '문'을 예비해 두었다는 것이 영화의 주요 설정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인공 오필리어가 바로 지하 세계의 공주로 상정된다. <판의 미로>라는 영화는 따라서 동화의 후속작이 되며, 기억을 잃은 공주, 지하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적 존재로 오필리어가 지명된다. 하지만 소녀는 불안정하다. 지하세계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특별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현실 속에 녹아든 존재도 아니다. 소녀는 환상과 현실 그 어드매를 떠돈다.


그러한 오필리어가 '가고자'하는 세계를 굳이 꼽아보자면 어머니와 함께 비달 대위(세르지 로페즈)의 시야를 벗어날 수 있는 곳일 게다. 문제는 소녀의 눈 앞에 닥친 현실이다. 1944년, 스페인 내전 속에서 오필리어는 비달 대위 옆을 벗어나기 어려우며, 오로지 슬픔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소녀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필리어의 앞엔 자꾸만 판(더그 존스)이 나타난다. 그는 유혹을 가장한 위협을 하는 이상야릇한 존재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내미는 손길이 오필리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책이라는 것이다. 오필리어에게 처음부터 선택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를 지키거나 메르세데스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출산 중 사망했고, 메르세데스와 오필리어의 도주는 실패하였으므로, 끝내 모든 선택의 자유가 박탈당했다.


영화는 자꾸만 오필리어를 지하세계(죽음)로 이끈다. 물론 비달 대위를 벗어나고자 하는 오필리어의 욕망은 그 자체만으로 고통 없는 세계로의 회귀(지하 세계로의 복귀)를 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요소는 소녀가 하강하는 모습으로 시각화된다. 소녀는 무화과나무 기둥 아래로 들어가며, 어머니의 침대 아래에 맨드레이크를 넣어두고,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특별히 조성된 마법 공간 속으로도 내려간다. 이러한 물리적인 하강곡선은 현실에서의 인물 관계 속 하강곡선과 맞닿는다. 이상하리만큼 소녀의 일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최선을 위한 선택은 소녀를 배반한다. 더러워지지 않도록 나뭇가지에 걸어둔 어머니의 선물, 초록색 원피스(일종의 초대장)는 바람에 날아가 진흙투성이가 되었으며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침대 아래에 넣어 둔 맨드레이크는 어머니의 손으로 파괴된다. 아이는 궁지에 몰린다.

오필리어의 시련 중 가장 강렬한 죽음 레퍼런스는 역시 손에 붉은 눈동자를 박은,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이 있는 곳에서 포도알을 따 먹는 시퀀스일 것이다. 그 모습은 하데스의 세계에 영원히 갇힐  뻔했던 페르세포네 신화를 떠올리게끔 한다. 괴물의 끔찍한 형상을 제하더라도, 우리는 금기를 깨는 오필리어의 행위에서 이미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두 번째 임무에 실패했음에도 오필리어가 살아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음식도 섭취해선 안된다는 조건도, 모래시계로 제한된 시간도 어겼는데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은 소녀가 죽을 자리(도달해야 하는 올바른 미궁의 심장)가 아니었다. 따라서 소녀는 판의 요정을 제물 삼아 돌아올 수 있었다. 두 번째 임무로 부여받은 그 장소는 그저 미궁에 달하기 위한 수많은 가지 중 한 군데였기 때문에, 오필리어는 그곳에 갇힐 수 없다(죽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단순히 "미궁"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채택하지 않고, "판의" 미궁(미로)이라고 제한을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미궁'이 두 가지라는 점에 있다. 첫 번째, 즉 환상 세계 속 미궁은 당연하지만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등장한 지하세계의  것이다. 두 번째, 현실 속에서도 판의 미궁과 대치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어머니의 자궁이다. 오필리어가 태어나지도 않은 남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책의 이미지 없이 내레이션만으로 진행된 동화로 영화의 오프닝과 크게 그 구조가 다르지 않다. 오필리어는 말한다. '옛날 옛날에…….' 남동생은 지하세계에 갇힌 공주는  아니지만, 빛을 알지 못하는 자궁(미궁) 속 존재(오필리어는 동생을 왕자로 지칭하기도 한다)다. 아마 동생이  태어난다면, 그 역시 빛과 바람을 마주하는 대가로 자궁 속에서 키웠던 자신의 기억은 모조리 잊게 될 것이고 미궁(자궁) 속에서 바랐던 세계와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오필리어가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될 배신(회귀의 비가역성)을 내포한다. 삶 이전의 장소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다. 달리 말하자면, 산 자는 지하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모안나 공주의 아버지는 공주의 '영혼'을 위해 문을 열어두었을 뿐 공주의 '육체'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게 비책을 마련하진 않았다. 그러나 영화의 끝점에서 카메라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지하세계에 오필리어가 무사히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소녀의 작은 소망일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내레이션이 더해진다. 공주가 지상 위에 흔적을 남겼노라고. 그러하므로, 현실 속에선 비가역적일 수밖에 없는 지하세계로의 귀환을, 영화적 문법으로 가능케 한 장소인 '판의 미궁'은 그 어떤 제목보다도 유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다시 본 <판의 미로>는 햇빛과 푸른 하늘, 부드러운 바람으로 가득할 줄 알았던 세계가 사실은 고통과 아픔, 배반과 슬픔으로 가득한 세계였다는 것을 깨닫고 만 공주의 처절한 비극처럼 보인다. 무수한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든 세상을 사랑하려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배신당하고,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사 없는 자장가일 수밖에 없었던 한 소녀의 안타까운 이야기로. 그래서일까. 어쩐지 이 영화의 제목을 해체한다면, 결국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제목과 맞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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