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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r 18. 2019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2017)> 리뷰

나의 상실은 사랑을 위해 예비된 공허일지니

<셰이프 오브 워터>는 2018년, 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영화다. 매니악한 정서의 영화를 자주 제작하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이 영화는 여러 굵직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황금사자상을, 골든 글로브에서는 감독상과 음악상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을 비롯하여 4관왕을 달성했으니 그 작품성에 대해선 내가 굳이 분석하거나, 덧붙일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선 여전히 할 말이 많다. 세계의 관객과 유수의 영화제가 인정할만큼 너무나도 좋은 작품이었던 <셰이프 오브 워터>는 정말 많은 재료를 품은 이야기다. 작중 배경인 냉전 시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다시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테크닉적으로 시퀀스를 분석해도 좋고, 카메라 앵글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며, 쇼트별로 사용된 색과 빛에 대해서도,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모호하고도 아름다운 사운드 트랙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하룻밤은 족히 새울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오늘 적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의 독백에서 출발한다.


……Or perhaps I would just warn you, about the truth of these facts. And the tale of love and loss. And the monster, who tried to destroy it all.

자일스는 카메라가 수면에 잠긴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의 집을 유영할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 만일 이 이야기에 대해 자신이 관객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당시를 회고할 것인지 (즉 시간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지), 혹은 모든것으로부터 고립된 항구도시라는 장소에 맞추어 말하는 것이 좋은지, 목소리를 잃은 공주 '엘라이자'에게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지…… 그러나 이 영화의 생존자이자 나레이터인 자일스는 사실로 쌓아 올린 진실이라는 성벽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 말한다. 동시에 이 동화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한국에 수입될 때,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그 부제는 분명 반쪽자리 제목이다. 자일스는 자신이 전달하는 이야기에 대해 상실이라는 또다른 단어를 곁들였으니까. 사랑의 다양성, 부정형성을 암시하기 위해 감독이 <셰이프 오브 워터>라는 제목을 사용했다는 해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물(사랑)이란, 사실, 빈 자리를 채움으로써 자신의 형태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사랑이 들어서기 위해선 사랑을 위한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카메라는 결여된 인물들을 쫓아간다. 엘라이자는 분명 자족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는 뻐끔거리기만 하는' 존재라고 말할 만큼의 빈 공간을 지닌 인물이며, 장애인이자 청소부로서 사회 내에서도 자주 지워지는 존재이다. 자일스는 백인 남성임에도 동성애자이기에 사회적으로 배척받고, 노력했음에도 이룰 수 없던 사랑으로 텅 빈 공간을 보유한 인물이며, 드미트리 호프스테틀러 박사(마이클 스털버그)는 애국심을 배반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각각의 상실은 새로운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세 사람이 크리쳐(더그 존스)와 나름대로의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끈다. 엘라이자는 크리쳐(더그 존스)와 사랑을 나누고(에로스적 사랑), 자일스는 크리쳐에게 용서를 베풀며(아가페적 사랑), 드미트리는 크리쳐를 살린 것이다(지식적인 플라토닉 사랑).


반면 엘라이자의 친구 중 젤다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지만, 결혼이라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랑의 형태를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카메라는 젤다의 사정에 크게 집중하지 않고, 그의 남편은 영화의 끝에서 간신히 얼굴을 비춘다. 그래도 젤다의 사랑은 영화 내에서 최악으로 묘사되진 않는데, 그가 솔직하게 자신의 결혼생활에 불만을 표한다는 점에서 정직이라는 가치가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속 진정한 괴물인 리처드(마이클 섀넌)의 결혼생활은 어떠한가? 그의 사랑, 결혼생활은 연기로 점철되어 있다. 아내와의 정사가 엘라이자의 청소 쇼트 속에 쓸려나가기까지 하니 그의 사랑이 얼마나 허망하고도 덧없는지를 손쉽게 짐작할 수 있다. 카메라는 그의 생활이 그 자체만으로 허위이며 상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사랑이 채웠어야 하는 빈 공간 위에 대체제로 덧씌워진 허위는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 뿐, 어떤 생산적인 결과도 낳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또한 사랑이 상실을 어떻게 물들이고, 마련된 공간을 확장시키는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첫째로 제시된 방법은 색깔을 활용하는 것이다. 사랑은 붉은색으로 비유된다. 엘라이자는 영화의 초반부부터 에메랄드빛을 자신의 고유색으로 삼고 있으며, 부드러운 황동빛은 허용하지만 붉은색은 그의 방(삶)에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엘라이자의 세상에서 한 발짝만이라도 밖으로 나아간다면 그곳엔 참으로 다양한 붉은색이 존재한다. 영화관의 간판, 불이 나는 초콜릿 공장, 빨간 구두 등이 그 예다. 그것들은 차츰 그녀의 세계에 합류하고 그녀를 뒤흔들며 또 바꾸어 나간다. 빨간 구두,  머리띠, 원피스, 그리고 엘라이자가 흘리는 자신의 붉은 피. 사랑은 그 때에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둘째로 감독은, 사랑이 지닌 다소 이기적인 속성을 함께 그려낸다. 빈 공간을 채운 사랑은 물과 같아서, 흐르기 위한 충분한 장소를 요구한다. 사랑을 위해선 한 사람을 위한 욕조, 한 생명체를 위해 특별히 개조된 수조 이상의 장소가 필요하다. 방을 물로 채우는 것만으로는 영 부족하다. 사실 사랑(물)을 한 곳에 묶어두고 고여 있으라 명령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어폐였다. 물(감정)은 집(개인) 밖으로 흐르고 또 흘러야 한다. 엘라이자와 크리쳐는 부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혹은 총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은 저마다 다른 깊이와 형태의 빈 공간을 지닌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플롯은 인간이 지닌 빈 공간은 타인을 초대할 수 있는 자리이므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스크린 속 색감으로써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물드는 것이라 속삭인다. 그래서일까. 전체 영화를 지배하는 초록색은 차갑지만 또한 기이하리만큼 따뜻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웰메이드 어른동화인 이유가 아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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