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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pr 14. 2019

영화 <벼랑 위의 포뇨(2008)> 리뷰

누군가 평화화 공존에 대해 묻는다면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가 처음 나왔을 때를 기억한다. 벌써 10여 년 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하여간 그때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치고 조금 '약하다'라고 주변 사람들이 귀띔해 주었더랬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괜히 남들처럼, '이제 지브리도 한 물 갔지, '라고 말하는 것이 폼나 보인다는 헛바람에 심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나는 영화 속 세계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디지털 애니메이션 뒤로 보이는, 종이 질감과 색연필의 색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소스케 (도이 히로키)의 집은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일러스트의 감성을 재현한다. 분명, <벼랑 위의 포뇨>는 이전 작품들처럼 거대한 주제의식을 담아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고, 여전히 각 인물들은 활달하고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만, 그것이 서사의 전반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각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품은 시선은 소소하고도 아름다운 주제를 전달한다. 타인의 '다른'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는 마을 사람들을 통해서.



포뇨 (나라 유리아)는 본디 인면어였다. 그러나 소스케는 '금붕어'라 부르고, 그의 유치원 친구 역시 포뇨를 조금쯤 짜증 나는 금붕어로 인식한다. 어린아이라면 인면어의 존재를 모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소스케의 어머니인 리사 (야마구치 토모코) 역시 아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 금붕어가 샌드위치의 햄을 빼먹는 것에도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으며, 파도 위를 뛰어다니는 소녀가 있다는 아들의 말에도 꾸짖음 없이 바다를 바라보기만 한다. 금붕어가 소녀로 돌아왔다는 소스케의 말에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 속에서 거의 유일하다고 할 만한 반대자를 꼽자면, 아마도 해바라기 양로원의 토키 할머니 (요시유키 카즈코) 정도일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동화적인 세계에서 일말의 이성을 상징하는 듯한, 무뚝뚝하더라도 소스케를 아끼는 토키 할머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역시 이 세상 속에서 배척받지 않는다는 것일 테다. <벼랑 위의 포뇨> 속 세상은 그런 곳이다. 포뇨의 아버지 후지모토(토코로 조지)의 제안에 반대하여 지상에 남았던 선택을 그른 것이라고 엄정하게 결론 내리지 않는다. 의심이 깃든 진단은 때로 필요한 것이라 인정한다. 리사를 찾을 수 없어 무너질 뻔했던 소스케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며, 후지모토의 마법에서 잠시나마 회피할 수 있는 품을 내어준 것은 다름 아닌 토키 할머니였다.



인어공주를 모티프로 출발했다는 이 영화는, 주인공을 소년과 소녀로 설정하였기 때문인지 아이의 눈높이에서 재구성된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가장 중요한 플롯인 포뇨와 소스케의 만남에선 약간의 오해가 가미되며 (포뇨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소스케), 포뇨가 소스케에게 베푸는 도움은 손가락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선에서 그친다. 더군다나 포뇨가 후지모토의 세상을 탈출하는 '의도치 않은' 소동은 정말이지 막무가내로 발생한 소동이다. 가장 순수한 존재가, 가장 자신에게 솔직했기에 벌어진 사건. 그리고 포뇨가 오직 다섯 살 아이이기에 가능한 장면이 영화의 끝에 나타난다. 포뇨는 마법을 영원히 잃게 되리라는 그랑 맘마레 (아마미 유키)의 예언 앞에서 고민 없이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고 마법을 포기하겠다는 용감한 대답을 내놓는 것이다. 이 장면은 인어공주의 목소리와 다리가 교환되는 순간과 질적으로 다르다. 아이들의 계산 없는 마음은 섬을 통째로 바닷속에 가라앉힐 수도 있고, 장난감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만큼 파괴력이 어마어마하지만, 꼭 그만큼 진심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이미 바다 밖 세계를 보았기에 자신의 마법이 얼마나 가치로울지를 알면서도 포뇨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기꺼이 포기할 줄 안다.


한 세상에 온전히 뒤섞이기 위해선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던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인어공주에겐 그것이 목소리였고 포뇨에게는 그것이 마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기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제 때'가 오기 전까진 어머니라는 중간 매개자를 거쳐야 한다. 바다와 육지에 떨어진 소스케의 아버지와 리사가 소통을 하려면 빛과 모스부호를 통해야 했다. 잃는 것은 때로 선택이고, 때로 강제되는 것이지만, 공존을 위해선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셈이다.



<벼랑 위의 포뇨>는 심각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부드럽게 이야기를 흘려보낸다. 두렵고 무섭게 표현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는데도, 이제 막 내놓은 빨래가 바닷속 깊은 곳에 잠겨있는데도 말이다! 부자연스러운 일들이 팡팡 터지고 있지만 극 중 인물들은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물 흐르듯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렇구나, 말하며 호호 웃을 뿐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메시지를 도통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사실 그러한 '무위(無爲)'에 가까운 모습 자체가 영화의 주제 이리라 믿는다.


분명 이 이야기는 동화 속에서 펼쳐진다. 그렇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우리와 먼 이야기처럼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명제일 게다.  <벼랑 위의 포뇨> 속 인물들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권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소스케의 아버지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떠올려보자. 거대한 해일로 모든 것을 잃을뻔한 이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이다. 당신과 나의 '다름'에 끊임없이 이름 붙이고, 비천하다거나 특별하다고 분류하지 않는다면, 모든 이들이 타인의 모든 면모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품어내는 다섯 살 어린아이의 시선을 본받을 줄 안다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맞이하게 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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