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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pr 12. 2019

영화 <어느 가족 (2018)> 리뷰

부족한 선(善)과 악(惡)이 같지 않다는 속삭임

세상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아마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해도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경계선, 펜으로 깔짝이고 싶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회색 지대를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매한 영역을 건드리는 분야 중 하나가 예술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기에, 예술은 항상 무언가를 표현하지만, 표현함으로써 부족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체화된 이상 따위는 결국 존재할 수 없다는 발상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어느 가족>의 원제는 <万引き家族>이며 영어 제목은 <Shoplifters>이다. 원제와 영어 제목 모두 이 가족의 정체를 처음부터 일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입할 때엔 제목을 정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하기사 '도둑'과 '가족'이라는 단어가 공존할 수 있다는 발상과 감성은 우리나라에서 간단히 받아들이기 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것 같다. '어느 가족'이라는 말은 꽤 포괄적인 묘사처럼 느껴지지지만  아마도 그것이 최선이었을 제목이 아닌가, 싶다.



영화는 처음부터 원제목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오프닝 쇼트는 부자(父子) 관계로 추정되는 두 사람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마트에서 소소한 도둑질을 양심의 가책 없이,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하는 모습을 잡아낸다. 이 가족의 비밀은 일상적인 절도일 뿐일까? 곧이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좁은 집에서 살을 붙이며 제법 정답게 사는 이들은 피붙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무언의 선과 규칙이 존재하기에 아슬아슬해 보일지언정 이들의 삶은 끝까지 유지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유리(사사키 미유)라는 소녀를 발견하게 되며 이들의 일상엔 새 바람이 분다. 자신들의 행동이 의도치 않게 유괴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바타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소녀를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싹둑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새 이름을 붙여주고, 아이를 껴안아 준다. 사랑한다는 건 폭력이 가미되지 않은 관계라 말한다.


영화 <어느 가족>에는 다양한 삶의 양상이 과하지 않게, 그리고 밉지 않게 넘실댄다. 모든 이는 저마다 절대 사소하지 않은 사정을 품고 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받았고, 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건넨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옳은'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노부요가 유리에게 말했듯 이 가족 내에서 물리적/신체적 폭력은 나타나지 않지만 쇼타(죠 카이리)가 끝내 회의감을 느꼈듯, 도둑질을 거듭하는 삶은 사회에서 아동학대라 이름 붙이는 행위이다. 시바타 오사무(릴리 프랭키)가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일러준 행위는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 설명이다. 돈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문제로 시바타 하츠에(키키 키린)의 장례를 어영부영 넘기는 모습 역시 지극히 담백하게 스크린에 묘사되고, 시신을 마당에 묻는 모습은 생략된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행동은 역시 범죄로 귀결된다.


이 가족이 완벽히 악한가? 아마 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이라면 이 물음에 아니라 답할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선하냐는 질문에도 쉽사리 긍정하긴 어렵다. 이들의 삶은 어떠한 경계에서 부유한다. 부족한 선은 절대악이 아니지만, 부족한 악 역시 절대선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도덕과 부도덕이 혼재되어 있되 그것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혈연으로 이어졌으나 감정이 공허한 가족을 가족이라 부를 것인지, 돈과 범죄 따위의 복잡한 사정으로 이어졌으나 결국 서로를 보듬게 된 이들을 가족이라 부를 것인지에 대해서.



영화를 비롯한 예술의 미덕은 우리가 살 수 없는 삶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 있다. <어느 가족>은 그러한 예술로서의 제 역할을 톡톡히 다 한 영화다. 더불어 우리가 조금 더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조금쯤 다른 이들에 대해 고민하고 나의 삶처럼 여길 수 있도록, 참으로 복잡 다난한 삶을 그려냈으면서도 그 단면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중심을 잃지 않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감독의 역량을 재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느 가족>이 내게 선물한 것은 일종의 기회였다고. 아직 내게 생소했던 '유사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도록 빛을 던져준 영화라고.


유리가 친부모에게 돌아갔을 때, '옷을 사 줄 테니 가까이 오라'는 어머니의 말에 비로소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었듯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실제 삶에서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매체의 힘을 빌릴 수 있다. 타인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완벽한 공감은 할 수 없을 것이나 그만큼의 거리감은, 기실 어떤 삶이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니 틈을 메우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이지 않을까. 고레에다 감독의 <어느 가족>은 그런 발버둥의 산물이고, 발버둥 치는 누군가를 위한 선물일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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