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ther Mar 11. 2019

영화 <가버나움 (2018)> 리뷰

아이들은 모두 사랑받아야 마땅한데, 세상은 왜 이다지 참혹한 걸까

* 스포일러가 포함된 후기입니다.



이 영화는 최선을 다한 영화다. 최대한 진실된 이야기를 담고자 하면서도, 무의미한 불행의 나열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썼고 관객들을 피로하게 만들며 동정을 요청하지 않고자 하였다. 게다가 값싼 소비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신중을 가한 모습이 드러난다. 카메라의 워킹과 무브먼트도 나쁘지 않았다. 부감은 적재적소에 등장하였고 어린아이들은 마냥 순진하게만 묘사되지도 않는다. 다큐멘터리와 영화 사이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듯 균형잡힌 이음새로 조각했고, 메시지는 최근 내가 본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력하다. 아마 <서프러제트> 정도만이 간신히 비견될 수 있을 만큼. 그러나 주인공을 어린이로 설정하여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장점과 단점 역시 극명하다.


주인공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또래보다 몸집이 작지만 누구보다도 옹골찬 아이다. 아이의 생존 본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현실을 읽어내는 감각이 뛰어나다. 어디 그뿐인가? 위협을 빠르게 감지하고 그에 마땅한 탈출구를 수립하는 데에도 익숙하다. 이렇게 기민한 자인이지만, 학교 하나 다니지 못하고 가스 배달과 같은 일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아이의 오누이는 도대체 몇 명인지 가늠이 되지 않고, 이름 역시 모두 밝혀지지 않는다. 돌볼 여력이 되지 않아 수갑을 찬 상태로 헤실거리는 막내 동생을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다. 자인의 성장 환경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영화는 간혹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햇빛이, 자인의 얼굴 위로 내려앉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하다. 서류 하나 없는 아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존재, 아니 존재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반부에 자인과 만나는 라힐(요르다노스 시퍼라우)의 등을 묵묵히 따라가는 카메라 워킹은 끊임없이 변주되고 반복되는데, 관객인 우리가 그녀를 도울 수 없다는 막막함을 시사하는 듯하다.



위에서 자인이 얼마나 똑똑한 아이인지를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어른처럼 행동할 줄 알고 빠른 판단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몸집이 큰 이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험한 말을  쏟아낼 줄 알 만큼 대담하다 하더라도 자인은 어린 아이다. 돌아오지 않는 라힐을 기다리며 요나스를 돌보고, 어찌어찌 버티던 자인이지만 결국 세상 앞에서 무너진다. 요나스는 아스파르의 손에 넘어가며 서류를 위해 집으로 돌아갔던 자인은 누이의 죽음을 마주한다. 자인은 망설이지 않고 아사드를 찌르며, 그에 대한 대가로 감옥에 투옥된다. 감옥은 사회와 극도로 접촉이 제한된 사회다. 그렇다면 이곳에선 고통만이 연쇄적으로 그를 붙잡았던 시간들과 작별을 고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그조차 아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는 잃은 것만큼 돌려받는 신을 운운한다. 그러나 자인에게 새로운 아이는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에 가깝다. 끝내 저를 낳게 한 부모를 고소하며 자인은 외친다. 부모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게 해 달라고. 그 말은 마치 피를 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자인의 여정을 따라간 관객으로선 아이의 원망스런 목소리에 십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법정으로 자인의 이야기를 가져옴으로써 영화의 끝부분은 다소 미적지근하다. 주인공이 너무도 어리기 때문에. 아이가 볼 수 있는 세상에는, 아이가 꿈꿀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상황엔 한계가 있다. 학교조차 다니지 못한 아이가 보고 자란 세상은 본질적으로 좁을 수밖에 없다. 결국 자인이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은 자신을 둘러싼 어른들이지 사회의 시스템일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부모가 사회의 부조리를 방패삼아 비판을 온전히 피해 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한 살 사히르(세드라  이잠)를 닭 몇 마리에 팔아 시집보내는 모습 등을 우리는 이미 보아으니까.


그러나 카메라가 부모의 항변을 오롯이 담아낸다는 점이 이 영화의 기묘한 지점이기도 하다. 자인의 부모가 특별히 선한 사람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특별히 악한 사람들 역시 아니었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관습적인 삶을 반복했을 뿐이다. 무식과 무지로 점철된 극한의 사회 환경이 아니었더라면 이 부부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아이들 역시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무력하게 가정을 거듭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영화의 후반부는 다소 힘을 잃는다. 누구를 응원해야 하는지, 이 영화가 결국 무엇을 고발하고 싶은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워지므로. (물론 '모든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초반의 서사가 분명 부족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인의 신분증 발급과 혹은 개인의 망명에 기대어 사회에 만연한 가난의 굴레를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메시지도 강렬하고, 영화의 구성이 복잡하지 않음에도 이 영화는 보기 쉬운 영화라 하긴 어렵다. 이야기의 초중반은 분명 현실적이었으나 후반부는 낙관에 기대어 다소 실망스러운 구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현실과 맞닿은, 사회참여적 예술로써 영화가 어떻게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 생각한다.



★★★★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어느 가족 (2018)>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