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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pr 24. 2019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08)>리뷰

영원한 찰나의 추억, 작별에 충분한 날갯짓

만일 전쟁터에서 총을 들었던 젊은이들이 죽지 않았더라면, 어떤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그 안타까움을 기반으로 태어난 시계는 시간을 거꾸로 달린다. 역사에 가장 부질없다는 "만약"을 담은 이 시계는, 그렇게 창조자의 특정한 의도를 담아낸다. 시곗바늘은 여타 다른 시계처럼 운동하고, 특정 시간을 매분 매초 가리키고 있지만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로써의 기능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상징물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영화 속에서 그런 기호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장장 세 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8)>는 크게 세 개의 인생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에 가장 먼저 소개된 눈먼 시계공 게토(엘리어스 코티스)의 인생, 제목에서 드러나는 벤자민 버튼 (브래드 피트)의 인생, 그리고 그의 회고록을 듣는 데이지 풀러(케이트 블란쳇)의 인생이 그 주인공이다. 게토는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UP의 초반 시퀀스처럼 아주 짤막하게 언급된 것이 전부지만, 그의 물음과 삶, 그리고 시계는 하나가 되어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그러나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의 소망을 왜곡하였다. 떠올려보자. 게토의 물음은, 만일 징병된 젊은이들이 죽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즉 자신의 아들이 '살아 돌아왔더라면' 어땠을까에 가깝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의 인생은 어땠는가?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그의 시계는 물체가 아니라 자신의 몸 그 자체다. 관절염을 비롯하여, 수많은 질병을 앓는 늙은 몸으로 태어나 점차 젊어지는 남자. 육신의 시계가 완전히 뒤집힌 인물. 그의 육체는 남들과 다른 방향성을 띤다. 더욱 처절한 비극은 그의 정신 연령이 육체에 비례하지 않는 데에 있다. 벤자민의 시간은 다른 이들과 동일하게 쌓이되, 육체와 정신의 불가해한 교차가 일어난다. 벤자민은 그리하여 죽음과 너무나 가까운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사랑한 한 여자, 데이지가 있다. 이 여자는 벤자민을 사랑한 유일한 여자가 아니며, 벤자민 역시 여자가 사랑한 단 한 사람인 것도 아니다.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던 평범했던 접점도 있었고, 여러 특별했던 지점들도 있었다. 벤자민과 데이지는 각자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았다. 하지만 당신에게 두 아이를 키우게 할 순 없다며 훌쩍 떠났던 벤자민은, 끝내 기억을 잃은 아이로 데이지의 앞에 돌아온다. 데이지는 그를 기르되 기르지 않는다. 기이한 그의 신체를 보살핀다. 데이지라는 이름조차 발음할 수 없는 아기로 줄어드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데이지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벤자민의 일기장을 펼친다. 그리고 시계를 되돌린다. 벤자민의 일기장을 펼쳐보고, 자신과 벤자민을 닮은 딸에게 일기장을 읽어달라 부탁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헤엄친다.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라는 매체보다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이해할 수 없는 사례? 혹은 욥기처럼 신의 불가해한 의도를 읽어보자는 것이었을까? 예컨대, 여든 살 노인처럼 보이는 일곱 살 벤자민이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신이 행한 기적이었는지를 묻는가? 그렇게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라면 처음부터 그의 인생을 꼬지 않았으면 될 노릇이지 않은가. 신은 왜 그런 재앙을 안겨 주었는가? 하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고, 벤자민은 신을 갈구하지 않으며, 그저 많은 이들을 만나고 또 꿈을 꾼다. 그는 그렇게 인생을 감내한다. 시내를 나가며 인생 최고의 날을 경험한 그, 하루 2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일급에도 바다를 나섰던 그의 선택은 그런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존과 운명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선천적으로 주어진 질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최소한 벤자민은 자신의 증세를 그렇게 진단한다. 이미 주어지고 돌이킨 것에 대하여 좌절하는 대신 땅과 집을 벗어나 모험을 한다. 항해를 하고 강을 따라 보트를 탄다. 그는 그 자연스러운 물살(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비록 개인은 시간이라는 흐름에서 어긋난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을 살아가고 만남을 거듭하며 타인을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처음부터 수많은 죽음을 다루고 있음에도 벤자민 버튼이 특별히 죽음을 불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불어 영화의 초중반을 흐르던 압박감은 서서히 해소되기까지 한다. 인간들이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늙어 자신의 신체 능력이 떨어지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아마 아닐 지도 모른다고 벤자민을 내세운다. 지나치게 젊어져 사랑하는 이의 이름 하나 입술에 올릴 수 없는 순간 속에서 우리는 데이지를 본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금 물음을 게토의 소망으로 회귀시킨다. 나의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그 소박하고도 원대한 꿈으로 말이다. 죽음이 두렵고 슬픈 이유는 타인과의 관계에 근간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내가 짐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 내가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따위에.


인간이 맺는 사회적인 관계는 다양한 추억을 낳지만 다양한 상처를 심기도 한다. 최악을 피해 선택한 최선이 타인에겐 이기적인 욕망으로 비칠 수 있으므로. 괴이한 아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토마스 버튼 (제이슨 플레밍), 함께 나이들 수 없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벤자민 버튼, 가벼운 쪽지로 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던 엘리자베스 애버트 (틸다 스윈튼), 그리고 또 수많은  이들. 그러나 그 모두는 결국, 최초의 감정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그 점에 있어 대단히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한다. 어떻게 해서든, 믿을 수 없게도 돌아오는 장면들을 여러 군데에 삽입함으로써. 토마스는 자신의 부를 물려주며, 벤자민은 딸과 인사하고, 엘리자베스는 육체적 한계를 깨뜨리며 꿈을 이루는 데에 제한된 시간이 없음을 암시한다.




허리케인이 불어오는 그 순간에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를. 그리고 각자의 인생 앞에서 낙관을 유지하기를.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사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재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창을 가벼이 흔들던 바람이 거대한 폭풍으로 진화하는 것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재난이 되어 인간을 압도한다. 그러나 일곱 개의 벼락은 기억을 잃은 순간에조차 인간을 쉴 새 없이 일으켜 세우는 이야깃거리가 되며, 떠올릴 수 없는 이가 가르친 피아노 연주법은 여전히 내 손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영화는 말한다. 보아라, 모두의 삶은 예술이지 않느냐. 허리케인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의 재해가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거스르는 벌새의 날갯짓이 있다면, 우리에겐 아직 작별을 위한 순간이 얼마든지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세상에, 삶은 누구에게나 이다지도 공평한 재앙이었다. 열 달을 배 아파 낳은 아이는 쪼글쪼글하도록 늙어있고 세계를 뛰어다니는 댄서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재산을 잃는 순간이 있듯이. 그것은 아주 사소한 우연이 겹치며 발생한다. 그렇게 원망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산다. 그럼에도 때로 짐 속에서 발견된 일기장으로 남을 때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바다가 시계를 쓸어가듯 자연스레 발생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하더라도 죽음은 하나의 순리이며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종착지다. 하지만 어떤 찰나의 추억은 영원하며 어떤 순간의 날갯짓은 작별인사를 하기에 충분하므로 꿈을 꾸기에 부족한 순간은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내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정말이지,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설령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고 있다 하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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