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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y 27. 2019

영화 <케빈에 대하여 (2011)> 리뷰

존재의 근원이 사랑이 아니라 혼돈 일지 모른다는 낯선 가정

찰스 디킨스는 그의 대표작 『두 도시 이야기』에서 "미래가 걱정스러운 이유는 미지의 세계인 데다 희망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적은 바 있다. 여성에게 있어 임신과 출산은 불안정한 미래의 극단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아이를 낳았을 때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할지를 감히 예측할 수 없으며, 이 아이에게 어떤 감정을 품게 될지를 추측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모성애에 자신이 부응할 수 있을지를 셈하는 것조차 어렵다. 어디 그뿐인가. 어떤 아이가 태어날 것인지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아이와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상상하는 건 어떨까? 고도로 발전한 사회를 그렸던 영화 <가타카(1997)>에서조차 우생학적 요구조건에 맞추어 유전자 조작을 하고 아이를 낳지만, 그것은 아이의 신체 외적 조건을 맞추는 데에 집중되어 있을 뿐, 아이와 부모의 정서적 관계를 보장하진 못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부모-자식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악조건 몇 가지를 극단으로 몰고 간 영화다. 임신은 계획되지 않았고, 어머니인 에바는 부모라는 지위를 바라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며, 자식 케빈(에즈라 밀러)은 이상할 정도로 에바의 손길을 거부하고, 동시에 영악하기 짝이 없다. 이에 더하여 아버지인 프랭클린(존 C. 라일리)은 좋은 사람일지언정 좋은 남편은 아니었고, 둘째 실리아(애슐리 게라시모비치)는 유감스러울 만큼 예쁜 딸이었기에 케빈과 에바의 관계를 더욱 벌어지게 만든 존재가 되고 만다. 결국 에바와 케빈의 사이는 부모-자녀의 관계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기만 하는 프랭클린의 이상에 미치지 못하고, 좁혀지지도 못했다.


에바는 케빈을 거부하고, 케빈은 에바를 조롱한다. 이 과정에 노력이 전혀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두 사람을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름대로의' 노력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의 울음소리 대신 공사장의 소음 앞에서 평온을 찾던 에바가 케빈에게 책을 읽어주고, 공을 굴려주던 장면들을 떠올려 보라. 평범한 가정을 연출하기 위한 저녁식사 자리도. 하지만 예민한 케빈은 알아차린다. 그것들은 모두 노력일 뿐 진심에의 발로가 아니라는 것을. 어린 자식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모라는 절대자 아래에서 생존해야 하기에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어머니의 마음이 자신에게 닿아 있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했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꼬여 있는' 이야기다.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 독박 육아가 문제였나? 그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이상적인 '어머니상'에 대한 요구가 기저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쉽지 않으리라. 누구나 처음일 수밖에 없음에도 완벽할 것을 요구받는 모성애에 대한 환상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제쳐 놓더라도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수많은 키워드로 읽어낼 수 있는 영화이며, 아마도 사회의 변화 속에서 또다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영화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세 가지 키워드로 영화를 읽어내고 싶다: 미장센의 측면에서 고른 '빨간색, ' 영화의 주요 소품이자 케빈을 상징하는 아이덴티티이기도 한 '화살, '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케빈의 대사, '익숙한 것과 좋아하는 건 달라'를 통해서.


빨간색과 에바


<케빈에 대하여>는 토마토 축제가 화려하게 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든 곳, 그 정 중앙에 에바가 있다. 그녀는 앤디 워홀의 작품, '통조림 수프'를 연상케 하는 토마토 통조림 앞에 서 있기도 하며 붉은 펜으로 글씨를 쓰고 빨간 공을 케빈에게 굴려준다. 중첩되는 붉은색은 그녀의 열정을 상징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전체를 지켜보고 나면 자연스레 '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붉은색이 에바의 등장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그 이미지는 더더욱 강렬해진다. 자신의 이러한 기질이 어디에서 왔겠느냐고 에바에게 되물었던 케빈의 말마따나, 케빈에게도 붉은색의 속성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가 새빨간 딸기잼을 하얀 빵 사이에 과할 정도로 많이 펴 바른 후 흰 식빵을 꾹 눌러 즙을 짜내듯 쨈을 눌러버렸던 쇼트를 떠올려 보자. 일상 속의 괴기함을 극대화시킨 장면들은 그렇게 사소한 붉은색에 위화감을 더한다.


그러한 폭력적인 심상은 영화의 끝에서, 화살촉에 맞아 죽은 이들의 몸뚱이에 고인 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그 붉은색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바의 붉은색은 케빈에게로 넘어갔고, 타인의 피를 본 이후에야 주황빛 죄수복으로 색의 속성이 변화했으니까. 이 장면은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 "Slaughter is the best medicine(학살이 최고의 약이다)"를 말한 조커를 떠올리게끔 한다.


붉은색의 이미지는, 그렇게 모자가 공유하는 유전적인 (일종의) 고착 증세를 의미하는 것 같다. 자유로웠더라면 어떻게든 줄어들었을지도 모르는 폭력성 말이다. 어쩌면 펑펑 터지는 토마토 축제에서 건강히 해소될 수 있었고, 붉은 펜으로 종이를 사르며 감소할 수 있진 않았을까?라고 얄팍한 가정을 해볼 수 있는 기질은, 결국 줄어들지 못하고 새빨간 색깔로 세상 앞에 던져진다. 그리고 분출된다.


화살과 케빈


그렇기에 영화가 제시하는 '화살'이라는 소품의 중요성이 극대화된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케빈에게 활과 화살을 들려주었다.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총기사건의 주범인 총이라던가,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사용했던 폭발물이나 나이프가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순식간에 총알이 날아가며 상대를 관통하고, 삶을 종결짓는 모습은 케빈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케빈은 그 자신이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그는 언제나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다. 예리한 화살촉 한 번이 엷게 스치기만 해도 펑 터지고 말 풍선처럼.


화살과 총의 가장 큰 차이점을 잡아내자면 아마도 화살은 근본적으로 총처럼 난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아닐까. 케빈은 한 명, 한 명을 모두 겨냥하여 정확히 쏘아야 한다. 비록 영상이 그 과정을 모두 잡아내진 않지만, 우리는 그가 그것을 해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성질은 그의 광기와 공통된 구석이 있다. 집요함이라는 측면에서. 에바를 노려보고, 그의 신경을 하염없이, 그리고 꾸준히 긁었던 케빈의 그 집요함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케빈이 평생을 정확히 겨냥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과녁을 정확하게 꿰뚫고 그 위에 화살을 또다시 꿰뚫어, 결국 멀리서 보면 하나인 것처럼 보인 화살처럼 사실 그는 처음부터 한 가지만을 바라보고 있다. 케빈이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인 에바였다.


사랑과 습관


<레이디 버드> 속 주인공이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성인이 되기 전, 자녀들의 세계는 대개 가족관계에 가장 큰 비중을 두기 마련이다. 그러하므로 아이들은 부모와의 관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소시오 패스라고 흔히들 부르는 케빈조차 마찬가지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은 일찍이 에바에게 익숙한 것과 좋아하는 건 다르다고 냉철하게 지적했다. 언뜻 케빈은, 에바에게 대단한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에바가 그에게 사랑을 주는 것보단 그저 케빈이라는 예상치 못한 존재에 익숙하듯, 케빈 역시 에바의 무관심/혐오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케빈은, 그래서 에바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기대하지 않는다. 평생을 부정당했던 그가 선택한 것은 에바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왜 에바는 케빈이 벌인 일련의 대학살에서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케빈이 끝내 인정받고 싶은 상대가 에바였기 때문에? 그보다는, 케빈이 모두가 죽은 상황에서 홀로 살아남은 것이 가장 처절하고도 끔찍한 지옥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에바를 무너뜨린 케빈은 자신이 더 이상 집착할 곳이 없다는 걸 안다. 감옥으로 돌아가 붉은색이 한결 줄어든 오렌지빛 죄수복을 입은 케빈이 고백한다. 이젠 자신도 그 까닭을 모르겠다고. 이 일을 벌인 이유를 기억할 수가 없다고. 에바와 케빈의 화해는 - 혹은 일시적인 감정의 해소는 - 그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서로의 존재가 더 이상 관성적일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증오라는 이름으로도 묶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



<케빈에 대하여>는 아주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앞서 말했듯 다면적이고, 보는 이에 따라 감상과 주제의식이 천차만별로 갈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담담하여 더욱 잔혹해진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 가정이 얼마나 개인적 일 수 있고, 동시에 어디까지 사회적인 유기체가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 때로 어떤 문제는 오롯이 개인의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것처럼 보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경계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모든 존재는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판단은 사실 편의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끝없는 잿빛 혼돈 속에서 이따금 번뜩이고, 터져 흐르는 토마토의 과즙만을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하여 늘 최고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존재하는 변수 앞에서, 존재라는 혼돈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혼돈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영화는 질문을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진다. 극장을 나선 관객에게 질문의 답변을 넘기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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