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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y 29. 2019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리뷰

당신을 가두는 것은 어쩌면 당신 자신일지도 모른다

가끔 그런 것이 있다.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베스트 작품은 아니더라도, 가끔 돌아보고 싶은 작품들. 내겐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나, 디즈니의 <뮬란> 등이 그런 작품이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만든 수많은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 위치를 점한 지 오래다. 왜일까?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은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명확하게 짚어내진 못했다. 아마 처음에는 두 사람의 아련한 관계 때문이었던 것도 같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그렇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기저에는 하울과 소피의 로맨스가 존재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이 애니메이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야기는 아니다. 일례로, 소피의 사랑 고백은 마법처럼 하울의 저주를 풀어주지 않으며 하울과 소피의 첫 입맞춤은 모든 사건을 종결짓지 못한다. 스팀펑크 세계관 속 괴이쩍은 하울의 성 안에서 둘은 차츰 성장하지만, 이것이 성 밖 세상의 전쟁을 멈춰주진 못한다.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마법'과 '저주'가 판을 치는 세계임에도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성장은 어떤 과정을 통해 , 어떻게 완성되는가?



자고로 이야기 속 주인공의 성장은 갈등을 극복할 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언뜻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주인공들이 가진 가장 큰 고난과 역경은 개인에게 얽힌 일련의 저주처럼 보인다. 소피는 단숨에 노인이 되었고, 하울은 심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재가 된다 해도 저주는 남는다"라고 하울이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사라진다 해도, 말로써 구체화된 흔적이 없어도 저주는 존재한다. 관객은 기실, 같은 자리에서 그들의 상황을 엿보았음에도 황야의 마녀가 소피에게 건 저주는 물론이요 하울과 캘시퍼의 계약마저 무엇인지 명확히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저주가 그들에게 내렸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물들이 극복해야 하는 저주를 꽁꽁 숨겼을까? 심지어 소피나 하울이 황야의 마녀를 쓰러뜨린다 해도 소피의 저주를 풀 수 없다. 황야의 마녀에겐 '나는 저주를 걸 수는 있지만 풀 순 없는 마녀'라는 자기소개 문구까지 넣어버렸다! 우리는 당황하여 주인공들이 넘어서야 하는 자를 찾게 된다. 황야의 마녀가 제1의 적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인가? 하울의 스승 설리번일까? 형체 없이 지속되는 전쟁인가? 이러한 혼란은 확실히 이례적인 결정이라고밖엔 할 말이 없다. 인물의 성장/극복은 그 수행 과제를 명확히 제시한 후,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가장 밀도 있게 나타내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주인공들이 이겨내고 풀어내야 하는 것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소피의 노화와 하울의 검은 머리카락은 어떠한 상징에 불과할 뿐 그들이 실제 극복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조금 더 자세히 첨언하자면, 순식간에 아흔 살 할머니가 되었음에도 순순히 자신의 외모를 수긍하고, "나이가 드니 좋은 것은 놀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소피는 스스로를 가둔 틀, 즉 '욕망의 거부/제한'을 극복해야 한다. 검은 머리카락이 되어 비이성적으로 분노하고, 황야의 마녀를 두려워하여 온갖 부적으로 자신의 방을 채운 하울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과거'를 벗어나야 한다.




영화의 초반은 그 유명한 OST, 인생의 회전목마로 시작한다. 하울의 성이 차츰 걸어오고 소피는 실내에서 모자를 만든다. 소피의 삶은 단조롭다. 성격도 무던하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모자 가게를 '장녀'라는 책임감으로 지켜내는 삶을 살 뿐이다. 그저 그뿐이다. 마법사 하울과의 조우는 몇 배로 부풀려질 수 있는 이야기인데, 허공을 걸은 사건도 몇 년은 이야기해도 될 만한 어마어마한 사건임에도 꿈마냥 지나가는 사건으로 단순하게 축소된다. 어디 이뿐인가. 소피는 동생 레티가 잘 지내는 지만 알면 만족한다고 이야기한다.


레티는 그러한 자신의 언니에게 말한다. 언니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장녀'라는 역할에 매몰되지 않는 삶을 살라는 촉구는 언제 세상 위를 밟을 수 있을까? 소피는 삶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음에도 영화 초반에 한결같이 꽤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열어젖히지 않는다. 가게 안에서 모자를 쓰며 거울을 볼 만큼 사랑스러운 아가씨임에도 스스로는 그것을 부정한다. 아름답지 않아 하울에게서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르는데, 소피는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 동시에 그 좌절을 적극적으로 가시화시키지 않는다. 울지도, 비명 지르지도 않는다. 기대하지 않는 삶, 어제와 같은 오늘, 그리고 내일에 익숙한 10대 아가씨는 살아있는 시체에 다름 아니다.


흥미롭게도 황야의 마녀가 찾아와 (정체모를) 저주를 걸었을 때 소피는 아흔 살 노인으로 책정된다. 빛나는 청춘은 사라지고 통념상 '할머니'라는 언령에 따라 그녀의 욕망은 더욱 억압받는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소피가 자신의 인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를 따라가는 거니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의 후반부에 설리반은 물론이요 황야의 마녀를 등장시킨다. 노인의 욕망이 존재할 수 있음을 긍정한다. 즉, 소피의 자기 검열에 있어 외모/연령은 사실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설리반이 황야의 마녀가 가진 육신을 '원래의 나이로 돌려놓았다'면 황야의 마녀는 소피의 정신을 '원래의 나이로 돌려놓았다'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소피가 잃은 것은 나이/외모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일종의 인식론/세계관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소피는 꿈을 꾸는 순간 젊어지고, 설리반 앞에서 하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 어려지며, 아름다운 들판을 볼 때 깡총대는 소녀의 모습이 된다. 하지만 꿈에서 깨며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자신이 동생 레티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기존 인식론적 여성성의 박탈) 나이가 들고, 설리반 앞에서 하울에 대한 마음을 숨겨야 하는 순간 아흔 살로 돌아가고, 청소부로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하는 순간 다시금 할머니가 된다.


있음에도 말하지 못하는 것.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에서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저주이며 금기다. 소피에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가두는 행위 그 자체이며 욕망의 실상은 아름답고 싶다는 소망이다. 그것은 하울 앞에서 최초로 분출되고 비와 함께 씻겨 내려간다. 이 눈물은 소피 내면의 갈등이 한 차례 해소되었음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영화의 초점은 소피에서 하울로 넘어간다. 마음(혹은 심장)을 잃었는데 힘은 넘쳐나는 젊은 마법사에게로.



우스꽝스럽지만 영화를 보았다면 모두가 잊지 못할 장면을 꼽으라면 아마도 하울의 머리색이 변한 장면이 아닐까? 그는 아름다움을 상실한 순간 깊은 절망에 빠진다. "나는 단 한 번도 예쁜 적이 없었는데, 넌 고작 그 정도로 삶을 끝내느냐"라고 소피가 물었다. 다시 그 장면을 열어보자. 하울은 왜 머리색이 바뀐 순간 분노했을까? 그가 외모에 집착하는 마법사이기 때문에? 유미주의를 신봉하는 마법사여서? 그렇다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는 애니메이션인가?


하울에게 극복의 대상은 과거다. 그는 유성을 삼킨 소년이자 심장을 빼앗긴 소년이다. 그 대가로 마법을 얻었으나 그는 악마로 불리며 아름다운 아가씨의 심장만 뺏어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을 발 끝에 달고 산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소피가 말한 대로 그는, 한때 설리반에게 가장 총애를 받았던 학생이었음에도 '한심하게도 어머니를 왕궁에 보내는'이었다. 왜일까. 캘시퍼가 가진 하울의 심장은 '어릴 때와 같은' 심장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황야의 마녀(젊어 보이나 노인인 마녀)나 소피(늙어 보이나 소녀인 청소부)처럼 하울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이다. 청년처럼 보이나 어린아이에 다름없으므로.


그러니 우리는 하울이 왜 머리카락의 색이 바뀌었을 때 극렬히 분노했던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겉모습마저 통제를 벗어났다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돌아간 하울은 과거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그는 돌아가야 한다. 더 이상 과거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특히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으리라 믿었으나 그에겐 '가족(설리반의 표현에 따르면 '약점')'마저  생겨버리지 않았던가. 가족은 삼촌과 함께 있던 하울의 과거를 자극하며, 성장을 미루었다간 전쟁통에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화의 제목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지만 사실 성은 영화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않는다. 외양은 우리의 관념 속 성과 일치하지 않으며, 외부의 혼란을 튼튼히 막아주지도 못한다. 이 '성'을 물화된 하울의 육신으로 이해해 보면 어떨까? 이 관점에서 영화를 본다면, 성을 움직이는 핵심 전력으로 하울의 심장(캘시퍼) 외의 인물들이 생겼다는 것은 퍽 상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물처럼 보이던 성(=악마가 된 하울의 육신)을 움직이던 캘시퍼(하울의 심장)는 이제 가족(소피, 마르클, 캘시퍼와 황야의 마녀, 그리고 강아지 힌)의 손 위에 있다. 시간은 하울을 바꿔놓았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그리고 그는 이제 전쟁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그렇게 서서히 하울은 진일보하며, 마땅히 지켜야 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 말미, 소피 역시 자신의 성장을 증명한다. 자신의 소망/의지를 숨기지 않음으로써. 성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캘시퍼를 빼내고, 황야의 마녀에게 물을 끼얹는다. 그리고 감정을 숨기지 않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데, 이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에서 소피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 이리라. 하울은 어떤가? 새의 모습에 갇혀 소피에게 자신의 저주 하나 풀 줄 모르면서 큰 소리를 친다고 말했었지만, 이젠 새의 모습으로 소피를 보호한다. 과거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그가 심장을 되찾을 때다. 움직이는 성이 해체되는 순간 (악마로서의 하울이 소멸하는 순간) 성의 담지자였던 캘시퍼는 갈 곳을 잃었다. 이때 소피는 한 가지 중요한 비밀을 알려준다. 한 장소에 제한되어 삶을 마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렇게 그는 캘시퍼에게 자유를 돌려주며 하울에게는 그동안 거부했던 과거/마음/심장을 돌려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마지막 장면은 기존의 동화식 결말과 다르다. 억지로 움직이던 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음에도, 허수아비가 이웃나라 왕자로 변한 것을 알았음에도 소피는 하울에게 간다.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성장한 동료에게로. 이제야 겨우 심장을 돌려받아 그 무게조차 버거워 하지만, 자신에게 별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을 지녔다고 말해줄 수 있는 이에게!


나는 두 사람의 결합이 진부해 보이지만, 깔끔하며 또한 희망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눈부시게 남은 날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무게에 눌려 새로 변해 날지 못할 하울에겐, 새로운 성(소피)이  있으므로. 처음부터 날 수 없었고, 오로지 하룻밤 정도만 머무를 집/숙소를 구하던 소피에겐  날개(하울)가 생겼으므로.


그렇게 '인생의 회전목마'로 문을 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세계의 약속'이라는 노래로 끝을 맺는다. 단조롭지만 운명적으로 돌고 돌던 인생이란 이름의 회전목마는 이제 세계가 천명한 약속이 된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런 예언으로 끝을 맺는다. 당신 역시 인생 속에서 무언가를 마주하게 되리라고. 당신을 영원히 바꿔놓을 무언가를 반드시 만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이다. 무료한 삶 속에서 스스로를 옥죄는 무언가를 마주하고, 극복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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