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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맥베스 (2015)> 리뷰

원작을 존중한 각본과 탁월한 영상미가 만났을 때

by Heather

영미권에서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는 만큼, 또한 그의 글이 애초에 희곡이었던 만큼, 많은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렸고 또한 스크린 위에 담았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로미오와 줄리엣 (1968)>이겠지만, 나는 BBC 드라마 <할로우 크라운/텅 빈 왕관 (2012)>을 가장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벤 위쇼의 리처드 2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하튼 영화 <맥베스(2015)> 는 셰익스피어의 소위 '4대 비극'이라고 불릴 만큼 유명하고 또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이미 오슨 웰즈와 로만 폴란스키가 영상화한 바 있다. 그러나 본디 명작이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해석되기 마련이며, 그렇게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부여받는 법 아니던가. 21세기, 저스틴 커젤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2015년 맥베스는 원작의 장엄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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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Hover through the fog and filthy air.
선한 것이 악한 것, 악한 것이 선한 것.
안개와 더러운 공기 속을 맴돌아 다니자. "


원작의 황량한 황야를 옮겨온 스코틀랜드의 풍경은 압도적이다. 한기가 서린 위엄과 어둠은 극을 지배하는데, 이러한 스코틀랜드는 올해 초 내가 본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와 또 다른 모습이다. 어느 쪽이 '진짜' 스코틀랜드인지를 가릴 생각은 없으며, 내가 감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다만, <맥베스> 속의 스코틀랜드는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극본 속 장소,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속에서 관념화된 장소를 훌륭히 재현해낸다. 지나치게 목가적이거나 낭만화된 장소가 아니라, 전쟁과 삶이라는 결투장에 걸맞은 모습으로써.


맥베스는 본디 비극이지만, 특별한 적이 상정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더 비극적인지도 모른다) 험준한 산맥이 눈 앞에 놓여 있으며 마녀들이 극 중에 등장하지만 그네들은 절대적인 적이 아니다. 맥베스는 근본적으로 자연과 마법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가 혈투를 벌여야 하는 것은 자신의 멈출 수 없는 야망이다. 문제는 그러하다 보니, 극 중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래서인지 원작을 최대한 존중한 이 영화는, 동시에 '지루하다'는 평가를 종종 받는 모양이다. 그러나 장대한 영웅 서사 속에서 우리는 한 인물이 폐허가 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경험은 결코 흔치 않으며, 또한 그렇기에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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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원작을 훌륭히 옮겨왔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영화의 시놉시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따라서 차라리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국왕을 시해한 후 광기에 잠식되는 맥베스(마이클 패스벤더), 파멸해가는 남편 옆의 레이디 맥베스(마리옹 코티아르) 따위를 이야기하거나, 적재적소에 쓰인 배경 음악의 효과, 기존의 관념에서 탈피한 세 명의 마녀 등을 되짚어가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더불어 위엄이 더해진 영상과 로케이션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전쟁을 카메라에 담으며 슬로모션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눈여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되리라 믿는다.


커젤의 <맥베스>는, 일종의 신화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데, 그 면모는 전쟁터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물론 감독은 적나라하게 전쟁의 참상을 '전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슬로모션을 통해 시간을 손아귀에 쥔 감독은 승전의 기쁨을 삭제하고, 패전의 음울함과 다를 바 없는 죽음을 척박한 땅 위에 심어두었을 뿐이다. 뒤이어 마녀들의 예언을 더하며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에 인간은 어떻게 위치하는지를 영상으로 전달한다. 몇 가지 지점에 있어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정확히 따르지는 않았으나, 환영과 안개가 교묘히 뒤섞이기고 끝내 맥더프의 복수와 예언의 실현을 담담히 증언하는 영화 앞에서, 그러한 부분이 진정 중요한 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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