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이란 그저 소중한 상대를 마땅히 소중히 대하는 것
최근 이어지는 디즈니의 트렌드 중 하나를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큰 호평을 받으며 상승세를 누리는 알라딘(2019)을 보면 왜 그들이 실사화를 이끄는지 알 것도 같다만, 디즈니는 이미 수많은 패착을 경험했다.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이, <덤보(2019)>와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 (2018)> 등이 바로 우리 옆에 있다. 앞으로 나올 <라이온 킹>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이 마당에, 디즈니가 왜, 굳이 실사화를 욕심내는지 그 까닭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때도 적지 않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이해관계가 엮여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질문하게 된다.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일 때 가장 가치롭지 않을까? (통념에 근거하자면)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을 위한 세계이지 않은가. 상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고, 현실보다 더 엄격하게 권선징악을 구현해내는 그 세계 말이다.
아이들에겐 희망을 주고 싶다는 소망과 나쁜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디즈니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면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는 어쩌면, 그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노곤한 현실을 잠시 잊어도 괜찮다는 위로 말이다. 때로는 <알라딘>처럼 사회 시류에 맞춘 리메이크를 하면서도,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를 통해 위로와 공감의 가치를 직접 건네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화를 보는 거의 모든 순간, 나는 <신데렐라(2015)>에서 활짝 웃음을 터뜨리던 엘라를 떠올렸다. 한여름밤의 꿈과도 같은 무도회를 마치고 궁전을 나오던 순간에 그녀가 지었던 웃음이. 어쩌면 디즈니가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것은 그런 가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속 크리스토퍼 로빈(이완 맥그리거)은 여러 개의 레이어가 겹쳐 보였다. 자신의 의견과 관계없이 기숙학교에 갇혀야만 했던 어린아이, 갑작스러운 부친상으로 집안의 가장이라는 호칭을 물려받고야 만 소년이 우연히 사랑을 만나고 가정을 꾸리는 과정은 동화책저처럼 연출되었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아니까. 아이는 어른이 된다. 배움의 대가로 수많은 것을 잃고 또한 잊으면서.
하지만 헌드레드 에이커 숲 속의 정다운 옛 친구들, 푸와 티거, 피글렛과 이요르 등은 그를 매일같이 생각했다고 말한다.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 있는 눈빛의 크리스토퍼 로빈을. 풍선 하나에도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곰돌이 푸는 자꾸만 당연한 것들을 말한다. 보이는 것을 말하는 놀이는 당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이 실제 존재하게 될 때가 그것을 인지할 때라고, 이름 부를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함께 양질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서로를 받아들이거나, 때로는 과거로 함께 여행을 떠나거나, 미래를 함께 바라볼 줄 알아야만, 그래야만 관계는 의미가 있으며 낮잠 놀이조차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은 수많은 크리스토퍼 로빈을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다. 특히 결말부에서. 성인을 겨냥한 것 같음에도 영화는 지나치게 안일한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초반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대사를 고스란히 인용하여 대구를 만든 것 까지는 좋았지만, 갈등 해결책은 사실 안일하다 못해 게으르기까지 하다. 애니메이션이었더라면 용서할 수 있었을까, 질문을 갖게 할 정도로.
영화의 주제는 파랑새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 무언가를 찾는 눈빛이 변하지 않은 크리스토퍼 로빈들에게, 사실 가장 소중한 것은 당신의 옆에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니까. 가장 중요한 건 사실 그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이며, 동심이란 바로 그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한다. 소중한 곳에 소중한 사람과 함께 갈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생각은 작게 할지언정 넓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한다. 왜냐하면 걱정은 근심으로 가는 길이니까. 어딘가를 가야 할 때 가만히 있으면 그 어딘가가 내게로 온다는 푸의 말을 떠올려보자. 그 말을 조금쯤 분석해 보면, 그 어딘가가 내게로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세계관이 한 번 크게 기운 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의 가장 소중한 장소는 언제나 내게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하지만 장소로는 부족하다. 함께 마땅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그 소중함이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함께 보낸 시간이다. 일에 휩싸여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 당신에게 반한 것은 당신의 춤 때문이었다는 로비의 아내, 에블린 (헤일리 앳웰)의 고백을 돌이켜보자. 함께 웃을 수 있었던 시간 한 줌이 미래만을 바라보며 나를 봐주지 않는 시간보다 더 소중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What day? 무슨 요일이야?
Today. My favourite day. 오늘. 내가 좋아하는 날이야.
소중하다면 상대를 마땅히 소중하게 대할 줄 아는 것.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아끼고 또 기다릴 줄 아는 것. 당신이 잃어버린 동심은 그러한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 자리한다. 가끔은 그런 버튼을 눌러 주어야 하는 때가 있다.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를 보는 시간 내내 나는 행복했다. 빨간 풍선을 손에 쥔 푸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