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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17. 2020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리뷰

We want bread, but roses too

(* 본 글은 2016년도에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하였던 제 게시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올해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한 영화가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런 영화다. 이런 시국에, 이런 찰나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내가 만날 수 있는 영화여서 너무나 다행이었노라고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화. 거장의 확고한  신념과 뚜렷한 목소리가 강하게 전해지는, 좋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상영되는 동안 영화관 안의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영화는 꽤나 고요하다. 괴팍한 듯 보여도 누구보다  인정많고, 자신의 오점을 순순히 수긍할 줄도 알면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는 다니엘의 자취를 느리게 짚는다. 영화를  제작한 사람들은, 서둘러선 안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케이티를 따라가는 시선들도 자연스럽다. 세상의 수렁에  빠진 힘든 싱글맘의 고충을 가감없이 담는다.


    영국인들에겐 이 영화가 더 크게 다가왔을 것  같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인물들은 굉장히 영국적인 방법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니엘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소품 중  하나는 BBC radio 4였고, 뉴캐슬에 새로 온 케이티를 사람들은 악센트를 통해 이방인임을 인지한다. 이러한 방법의 인물  제시는 굉장히 생활 밀착적인 방식이지 않나. 계급이 여전히 잔존하는 영국사회에 살고 있는 이들, 아마 이 영화의 주인공들일 실제  인물들은 이 영화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상위 계급, 안정된 계급의 사람들은 내 이웃을 스크린을 통해 제 3자의 시선으로 마주해야  한다. 있을법한 모습으로 공기처럼 다가가는 캐릭터들을 보며 영국의 관객들은 전율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어쨌든 이 영화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영화다. 섬세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아님에도, 투박한 방식으로 그러나 정직하게 진실을  전달하고 있어 예술의 존재 의의를 알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브레히트적 방식으로 관객을 계몽하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기도 했다. 이  영화가 주로 사용하는 기법은 암전이다. 새까맣게 세상을 덮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상황의 답답함을 안겨준다. 나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 있음에도 스토리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도 느낄 수 있으며 까맣게 칠해진 세상에  다시 빛과 영상이 돌아와도 전혀 해결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의 절망감은 깊디 깊다. 


     어디선가 글을 읽었던 것 같다. 케이티가 무료 식재료를 받는 도중에 며칠을 굶었던지라 그 새를 참지 못하고 통조림을 열어서  허겁지겁 먹는 장면에 대해서. 그렇지만 내가 더 슬펐던 장면은 그 장면이 아니라 자그마한 슈퍼에서 서툰 솜씨로 생리대를 비롯한  일상용품들을 훔치는 순간이었다. 통조림을 열었을 때의 비참함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를 돕는 봉사자가 있었고, 다니엘이 괜찮다고  위로해주었으며 일단 물질적인 해결책이 그나마 존재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위생용품을 훔쳐야 하는 순간 그녀는 혼자였다. 아무리  마트 매니저가 덮어준다고 했어도 그녀와 그 사이엔 어떠한 인간적 유대, 감정적 존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끔찍한 장소를 나오는  순간 한 남자가 쪽지를 건낸다. 그 의미를 케이티가 몰랐을 리 없다. 여기서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소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비싸디 비싼 생리대의 가격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녀의 딸이  자라면 케이티와 같은 절망을 경험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외면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더불어 다니엘의 변화 역시 분명해서 가슴이 아팠다. 초반의 그는 자신이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웃집 흑인 청년에게 유난스레 굴기도 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그는 앤에게 말한다.  자존감을 잃은 순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고. 자신을 목록에서 빼달라고. 그의 모든것이 무너졌다. 아내와 함께 했던 최소한의  추억을 제외한 모든 것을 팔아야 했다. 그의 휑뎅그렁한 집 안은 폐허가 된 다니엘 자신이다. 그가 검은 스프레이로 자신의 주장을  벽에 크게 썼을 때 그는 일말의 자존감을 되찾는다. 그러나 경찰서를 나올 때 그의 눈엔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영화는 경찰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침묵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곳에서 그는 조금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스프레이를 뿌리는 그 순간은 최후의 발악이다. 살려달라는 최후의 손짓이다. 그러나 그것이 외면당했기에, 항소까지  갈 더이상의 힘은 존재할 수 없다. 존엄을 앗아간 세계는 곧 더이상 발딛을 곳이 없음을 의미한다. 얼굴을 씻으며 그는 거울을  바라본다. 자신이 산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진 얼굴은 결국 하나의 주마등이었다.


    아침 아홉  시의 장례식으로 이어지는 서사는 감독이 지닌 차가운 분노의 끝자락이다. 급작스레 뚝 끊기는 엔딩은 감독의 바람을 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외침처럼 느껴진다. 다니엘은 갔으나 그의 글을 읽은 케이티의 삶은 계속될 것이며 다니엘을  응원하던 실업자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찬란해야 할 청춘이 중국에서 밀수한 운동화를 팔고 있고, 그것을 자신의 미래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영화를 볼 여유를 지닌 우리는 그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 영화는 이 이야기의 바톤을 우리의  손으로 넘겨주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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