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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17. 2020

영화 <위플래시 (2014)> 리뷰

(* 본 글은 2015년도에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하였던 제 게시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위플래시.


 포스터만 보고 천재 드러머의 고군분투기라 생각했다. 한국영화  파파로티처럼. 선생이 그렇게 욕쟁이라더라, 하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오래 인터넷을 하면서도 스포일러는 정말 잘 피해다녔던 덕분에  이런 내용일 거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음악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한 청년의 열혈 성장기도 아니며,  사제관계의 아름다움을 그린 드라마도 아니다. 극단 혹은 그 극단의 너머를 보여주고자 하는 심리전, 혹은 아주 잔혹한 추격전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용납하지 않으므로써 이야기를 깔끔하게 "절단"한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며 내내 불편했다. 이야기의 일관성, 캐릭터들이 자신의 길을 재빠르게 질주하는 그 속력, 절벽에 떠미는 손과 그  무자비한 손짓에까지 매달리고자 하는 이, 이런 것들은 영화를 절정에 이르도록 한 일등공신이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몇 번씩 눈을 꽉 감도록 한 요소들이기도 했던 거다. 비뚤어진 교육관을 갖고 있는 선생과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어린 제자가 만났을 때 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가지들을 쳐내며 하는 몰입은 더이상 몰입일 수 없다. 그것은 중독이다. 그 중독의 한계에 다다렀을 때, 그리고 그 다다름을 깨달은 이후 인간은 어떻게 자멸하는지를, 보통 영화는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종국엔 죽음일 뿐이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위플래시 역시 마찬가지다. 치닫다 못해 피흘리는 두 사람(비록 한 사람은 자신이 피흘리는지 인지하지 못하지만)이  어떻게 남은 여생을 살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상상해 볼 뿐이다. 나는 영화상의 마지막 연주가 네이먼의 마지막 연주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드러머로써의 인생은 이미 끝났다. 플레쳐가 사형선고를 내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전의 상처조차 제대로 치유된  적이 없었기에. 아마 남은 그의 여생은 그가 몇번이고 언급한 다른 연주자처럼 젊은 나이에 사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감독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한계를  넘어서는 자만이 천재일 수 있고 그 한계를 넘기 위한 방법이 플레쳐의 방식처럼 극단적이라면 난 그저 평범한 소시민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 베토벤이 그런 아버지를 둬서 베토벤일 수 있었던 것이고 카프카가 그런 아버지를 둬서 카프카일 수 있었을까. 정녕  그러할까.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와 그 부모를 파괴하며 뛰어넘어 보이는, 훌륭하고 천재적인 자식이라는 관계도는 고대의 신화로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이야기 구조다. 인간은 여전히 같은 것을 고민한다.


 어쨌든,  결과를 위해 모든 수단을 소비해버리는 형태는 기형적인 결과를 빚어내며 어느 순간엔 순수해 보였던 목적이 일그러지며 잿더미가 되고  만다는 것을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를 감상한 직후엔 너무나도 끔찍한 시간을 견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상 이후  영화를 곱씹으면서부터 생각이 바뀌는 듯하다. 단순히 내가 느낀 그 불편함이 실제가 아니라 허구에 불과하다는, 감정이입의 순간에서  이성적인 판단으로 기억의 색이 바래지기 시작하자 나는 관련 글들, 삭제된 대본이나 감독의 인터뷰를 차근히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위플래시를 다시 보고 싶다. 그 광기어린 선율을 들으며, 조금 더 생각에 젖어보고 싶다.


 누군가가 유미주의를 주창하게까지 하는 예술은, 어떻게 탄생해야 하고 존재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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