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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pr 15. 2020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2019)> 리뷰

건축을 공부하는 친구가 있다. 말수가 없는 친구다. 이따금 과제가 어렵다거나, 프로젝트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고작이었다. 그 친구와 건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아무리 예쁜 건물에 들어가 인테리어에 신경을 쓴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더라도 말이다. 내가 건축에 무지한 탓도 있겠으나, 어느 날 친구가 “너는 루이스 바라간이랑 비슷해,” 라고 말해준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의 세상이 궁금해졌다. 건축은 뭘까? 내가 평소 무심코 넘겼듯, 건축이 정녕 회색빛 도심지에 삐죽빼죽 올려진 콘크리트 외벽이 전부인 세계라면, 친구가 이토록 열심히 매달릴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 몇 년 전 다소 지루하게 관람했던 콜럼버스(2017)가 떠올랐다. 녹색, 건물, 영화의 느린 템포와 면면히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내가 아는 건축가라곤 바우하우스, 안도 다다오, 알바 알토가 전부였기에 재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바로 이타미 준의 바다(2019)였다.



일본은 내게 고작 두 번의 여행이 전부였던 나라다. 그마저도 실은 오사카만 두 번을 갔던 지라, 다큐멘터리에 나온 장소엔 발조차 디딘 적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제주도도 다녀왔으나 여행 당시 방주교회는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건축에 정말이지 문외한이다. 어떤 건물이 세련되었는지, 어떤 모습의 건물이 이상적인지조차 모르는 건 물론이요 한국적인 현대 건축과 일본적인 현대 건축을 구분하라 하면 하지도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타미 준의 바다는 넋을 놓고 관람하게 되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완벽주의적인 면모와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공존하는 이타미 준의 모습 때문에? 그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먹의 공간'이 인상적이어서? 그와 인연이 닿은 수많은 이들의 따스한 증언, 혹은 우아한 영상 기법이 한 몫을 한 걸까? 여전히 나는 그 답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공간에 스며드는 건축을 지향하던 이타미 준, 자연적인 소재를 사랑한 건축가의 말을 인용한 나레이션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돈다. '나는 우선 돌을 보고서 선택한다. (…) 채석장에 와 보니 뭐랄까, 대략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지금 내가 설계하고 있는 건물에 이 돌이 어울릴지 어떨지. 크기는 어느정도로 할 지가 보였다.' 그는 현대 일본의 건축에서 결여된 본질을 꼽으라 한다면 그 중 하나는 인간의 체온일 거라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진단이 현대 한국에서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끊임없이 상승 곡선을 그리는 발전과 도시화는 지구가 생명에게 마땅히 전달하는 온기를 잊기 쉬우므로.


매 순간 무언가를 측량하고, 숫자와 함께 도면을 그렸을 이타미 준이 수치화 할 수 없는 환경의 문맥을 살폈다는 건 너무나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의 제목도 이타미 준의 건축을 닮은 듯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는 이타미 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모두 본 후에도 나는 한참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그는 건축가였지 해양 연구원이나 선박 기술자는 아니었지 않은가. 물이라는 소재를 중시한 건축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특별히 일생을 통틀어 바닷물을 중심적으로 염두에 둔 건축가는 아니었다. 이 제목을 선택한 감독이 의도한 바는 무얼까. 어쩌면 이타미 준이 바라보던 해안선이나, 땅 위의 벽을 세우던 그의 출발점인 시즈오카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바다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 거장의 널따란 세계관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복합적인 의미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려보고 싶다. '좋은 환경은 언제나 좋은 예술의 요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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