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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Apr 11. 2020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리뷰

미술을 다룬 영화는 수도 없이 많다. 화가의 일생을 다룬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2003)>, <미스터 터너(2014)>, <내 사랑(2016)>, 등이 있으며, 아예 미술품 경매사를 다룬 <베스트 오퍼(2013)>까지 있지 않은가. 영화가 미술이라는 주제를 정말이지 다양하게 변주하는 건 영화라는 예술의 태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 개봉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은 특별하다. 대다수의 영화가 한 점의 그림에 얽힌 비화나 화가의 일생을 따라가는 것과 다른 접근법을 취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불, 두 명의 여자,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소품 '초상화'를 모두 담아낸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상징을 욕심껏 사용했다. 한 프레임조차 쉽게 넘길 수 없을 만큼 암시적이며 관객의 적극적인 해독을 요구한다. 게다가 감독 셀린 샴마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대화로 직접 인용한다는 걸 생각해보자. 감독은 투박하면서도 고전적인 방식을 사용하지만, 우아한 영상미를 통해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는 점에서 본 영화는 적지 않은 키워드를 통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나, 이번 글에서는 상상마당에서 전시되기도 하였던 작품 내의 초상화-원화 작가 엘렌 델마르가 그려낸-를 중심적으로 비춰볼까 한다.


감독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와 초상화의 모델이나 자신이 모델임을 모르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를 제시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산책 친구를 위장하며 그림을 그려야 했다. 마리안느가 그녀를 파편적으로 스케치하는 모습은 끊임없이 긴장을 자아낸다. 수첩이라 해도 될 만큼 작은 스케치북에 다양한 각도로 담기는 손, 이목구비, 얼굴의 윤곽 등은 마리안느의 캔버스 위에서 한 점의 그림으로 합치된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말한다, 마리안느의 그림이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조각난 한 인간의 외면을 접합시킨 것은 마리안느의 기계적 상상이었다.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를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내야 하는 초상화 화가가 지닌 직무적 붓질. 그래서일까, 그가 그린 첫 번째 엘로이즈 초상화는 정면을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와 홍조를 띈 전형적 귀족 아가씨였지 절벽을 향해 달려가던 엘로이즈는 누락되어 있다. 녹색 옷을 입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은 자신 아닌 자신을 보며 엘로이즈가 말한다.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네요.” 엘로이즈는 화가도 아니며 당시 마리안느가 그린 그림의 모델로 앉아 있었던 것도 아니나 정확한 통찰을 내놓은 셈이다. 그린 이도, 대상도 담아내지 않은 초상화의 공허함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말에 완성된 초상화를 거둔다. 자신보다 먼저 왔던 화가가 미처 끝내지 못했던, 얼굴이 비어있던 그림을 불에 태웠듯, 거침없이 붓질을 해버린 거다. 그림을 자신의 손으로 훼손한 이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다시 담아낸다. 두 번째 초상화의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자발적인 과정이었다. 엘로이즈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비스듬히 앉아 마리안느를 응시했다. 캔버스를 태워버렸던 파괴적인 불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서 옮겨붙는 사랑이 되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두 번째 초상화에 대한 엘로이즈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마음에 든다는 그녀의 말에 마리안느는 “당신을 잘 알게 됐으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마리안느의 대답은 분명 반쪽짜리 대답이다. 엘로이즈가 자신을 그린 그림에서 마리안느를 발견할 수 없어 슬프다고 했던 부분, 즉 초상화의 본질은 때로, 대상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반영일 수 있음에 대해선 침묵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감독은 마리안느의 숨겨진 대답을 영화 전반과 후반에 배치해 두었다. 전시회에서 마리안느가 발견했던 흰 옷의 엘로이즈, 마리안느가 홀로 그려낸 엘로이즈의 뒷모습 등 다른 초상화를 통해서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이어졌다. 나태주 시인이 '나는 이제 너 없이도/너를 좋아할 수 있다'고 노래한 시구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초상화를 그리던 일, 이 주 안에 불이 옮겨붙듯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같은 기간 동안 그려진 그림이 액자 속에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듯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나눈 사랑의 경험은 느리지 않았음에도 이어진다. 얼굴 없던 미완의 초상화가 불길 속에서 사그러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런 점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초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상대방의 인격(혹은 영혼, 무엇이든 간에)을 온전히 담아낼 뿐만 아니라 화가 자신, 화가와 상대의 관계 모두를 구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림만이 진정한 불멸을 획득할 수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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