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이야기를 줄곧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여행을 떠날 때, 내가 인생을 파헤치는 근사한 탐험가가 되었다고 여긴 적은 없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독서는 하나의 여정이며, 책은 소설이든 실제 수필이든 타인의 삶을 편집해 둔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만 애서가인 나를 모험가와 동일시 한 적은 없다. 내게 여행은 그저 여행이었고, 독서는 그저 독서였으며, 삶은 그저 삶으로, 느슨한 연결고리로 맺어진 일종의 동맹 같은 관계에 가까웠다. 어쩌면 내가 한곳에 오래 머무는 삶을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번 전혀 다른 환경으로 이사를 거듭하였던 어린 시절을 겪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 그저 여행을 사랑하는 일개 개인으로서 책을 손에 쥔 걸까? 혹은 여러 사람의 추천 때문일까? 나조차 모르는 나의 지적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일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독서를 끝낸 후 내게 다시금 묻는다. 이 일련의 이야기를 통해 난 얼만큼의 여행을 경험하였나?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독서를 통한 여행은 오감으로 체험되지 않기에 내게 나타나는 변화는 실제 여행보다 매우 느리고, 추상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따금 분명한 목소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 책을 읽은 이후 자라난 질문처럼. 책의 각 에피소드는 어떤 기준으로 뽑혀 어떻게 배열되었을까? 이 글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여행의 이유’를 요약하자면 무엇일까?
내게 이 책은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선택하고 수용하는가, 라는 고민을 내려 담은 결과물로 다가왔다. 책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하였으나 돌이켜보면 제목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라던가, 여행을 가는 이유라는 제목이었더라면 달랐을 텐데, 여행의 이유라니. 느지막히 떠올려 본다. 이건 그가 겪은 각각의 여행 속에서 저마다의 이유를 추출한 글이고, 그 여행은 어쩌면 인생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한 개인의 속성이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시야를 확보하는지에 대한 내밀한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한국에서 작가이자 교수였고, 폴란드에선 작가이자 일종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 빚어낸 결과다.) 그렇게 저자는 다른 여러 아이덴티티를 거치고 둘러보며 여행자로 자신을 규정하기에 이른다. 그림자를 팔아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방랑자는 아닐지언정 흔히 말하는 온전한 정착과는 스스로 거리가 멀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러하니 여행이 곧 삶이라는 옛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여행의 이유는 삶의 이유와 같아졌다.
글의 구성에서도 한 인간의 아이덴티티 발견에 집중된 건 마찬가지였다. 첫 장에서 이방인이 추방자로 추락하는 과정을 담았으나 책의 마지막, ‘여행으로 돌아가다’에서 작가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이야기를 택함으로써 추방에서 귀환하는 구성이 완성되었고, 에피소드별로 분화된 듯 보이는 한 권의 책은 현명하게 조직된 하나의 유기체가 된다. 하지만 사실, 『여행의 이유』를 읽었을 때의 내 첫 감상은 타인의 여행을 목격한 목격담에 불과했다. 첫 장부터 끝까지 가볍고 즐겁게 읽었음에도 말이다. 그가 여행을 떠나고 획득한 것이 무언지는 어설프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어도,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찾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하니 내가 이 책을 거듭 읽게 된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여행의 주요한 이유는 – 고전적인 플롯에서 이미 알 수 있듯 나조차 모르는 숨겨진 나의 욕망이, 일상 속에선 묻혀 있던 그것이 전혀 새로운 장소에서 불쑥 튀어나와 우연히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감이 한몫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의 거대하고도 집념과도 같은 걱정이 한 인간을 갉아먹을 때, 우리는 여행 속에서도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글 말미에 작가는 적었다.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했었던 이라고.
자신의 의지로 여행하는 이들이야 분명 많아졌지만, 여행의 목적과 이유는 희부옇게 변했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관계가 많아졌고, 깊은 관계에 목말라 하는 사람도 함께 많아졌다. 관계의 역치가 변했기 때문일까. 스친 상처에조차 매달리고 오래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 역시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말 – 집은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기에, 뿌리 깊은 갈등은 오래된 집을 배경으로 삼는다는 문학적 관습은 한편으로 곧 바스러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구상 능력에 무게가 없는 만큼, 기억이자 편집된 과거인 그것은 사람의 관계 속을 떠돌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공간에 내재된 갈등은 축소되었을지 몰라도 행위에서 행위로 거듭되고 확장되는 갈등,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신화적인 집안의 연대기적 갈등은 사라지지 못한다. 나를 괴롭히는 것에서 떠나왔음에도 인간은 보이지 않는 감정과 의미, 우울에도 붙잡혀 살 수 있다는 걸 결국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귀했던 여행이 소비로 변하자 여행마저 일상의 노곤함에 잠식된 시대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급변했다. 현대는 멀티 페르소나라는 말이 유행하는 시대이며 SNS를 통해 사람들의 자존감이 쉽게 무너지는 시절이기도 하다. 확고한 나의 자아를 수립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그렇기에 외부 자극을 받아도 변화를 이뤄내기 어렵고 상처받은 연약한 자아에 눈물짓기 쉬워졌다. 타인의 의견을 고스란히 복제하고 확산 및 전달하는 것으로 형성된 가벼운 자아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하기 어렵다.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에 충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전의 과학자들처럼 우리의 신념 체계가 확고하여야 어떠한 충격 앞에서 그 충격파를 수용할지를 결정짓는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한 최소한의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이야기는 한낱 루머에 불과하다. 그러하므로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속도에 중독되어 경험을 소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한 시금석으로 삼기 위해서.
여행을 가기 어려워진 이 상황에서 여행의 이유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우스운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내 여행을 돌이켜보며, 나는 지금까지 여행의 목적은 있었을지언정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는 걸 알았다. 예컨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삶의 이정표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삶의 이유는 적당히 들은 명언을 너무도 손쉽게 되풀이하고 나의 의견을 덧대지 않는 현상. 꼭 그만큼, 나는 여행을 사랑했음에도 곰곰이 돌이켜보지 않았다.
‘떠나고 싶다’라는 감정적인 충동에서 출발하였던 내 수많은 여행은 시간을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 할 수 있던 최선이었으리라. 그러니 내가 행한 여행의 이유는 아마도 내 눈앞에 남은 무수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견딜 수 있게 돕는 해결이었을 것이고, 그러하였기에 일상 속에서 마주할 수 없는 순수한 통찰력으로 나는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여행을 가기 전과는 다른, 알 수 없는 변화를 겪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묻고 싶다. 여행이 삶의 원점인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든, 왜 인생이 여행으로 줄곧 비유되었던 것인지를. 여행의 이유가 아이덴티티의 회복이든, 일상에서의 도피이든, 오로지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물리적-혹은 심리적 굴곡 때문에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칠 만큼 끈질기게 살아남은 말이지 않은가. 삶의 이유를 죽음으로부터의 회피라 부르고 싶진 않으니 나는 그 이유를 각 개인으로 놓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삶의 이유는 아마도 ‘나와 당신’일 것이라고. 그래서 삶이 여행으로 비유되었던 게 아닐까. 삶이든 여행이든 어떤 과정은 필연적으로 나,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당신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니까. 이 당신은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일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른 타인일 수도 있는, 혹은 그저 대단히 추상적인 무엇일 수도 있는, 어떤 상대일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이로 가꿔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여행이 어려워진 이 시기, 나는 모두가 겪는 가장 긴 여행의 이유를 감히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