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형의 『붕대 감기』는 감각적이며 영리하다. 첫째로, 그는 대개 시간순으로 조직되는 소설의 구조를 해체하였으며, 둘째로 소위 하나의 ‘이즘’이라 해도 개인에겐 다르기 마련이라는, 당연하고도 불편한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느슨하고도 분명한 인물 사이의 관계성을 빌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심었다. 새로이 부상하는 신념 체계란 대체로 붕대를 감아주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때로 그것은 완벽하지 못하지만 분명 유의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몇 년 전부터 현대 한국을 강타한 페미니즘이라는 물결이 어떻게 일파만파 퍼져나갔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이가 설명하든 인터넷을 빼놓을 수 없을 터다. SNS가 기존 매스미디어의 대항마로 떠오르며 누리꾼들은 관성에 가까운 사회 오류를 지적했다. 여성의 희생 위에 쌓아 올린 전근대적 시스템을 구태여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상대방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했던 싸움(혹은 일방적인 저항)은 분명 지난했으며 항상 아름답지만도 않았다. ‘여성’이라는 동질성에 호소하고 연대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은 안일한 상상에 불과했다. 바쁜 일상에 매몰된 현대인은 자신의 독자적인 의견을 발전시킬 여력이 없었기에, 정제된 타인의 의견을 ‘입에 직접 떠 넣어줘야 소비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어쨌든 그 음식을 자신의 혓바닥에 올려 보았느냐, 아니냐는 분명한 차이를 생성하니까. 예컨대 필터링을 거쳐 편향된 의견만을 소화한다면 배탈이 날 것이고, 새로운 맛에 눈을 뜬다면 다른 음식을 접하게 되지 않겠나.
『붕대 감기』를 보자. 이 책엔 연령과 직업, 결혼 여부를 막론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소설 내 모든 등장인물이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없으며, 어쩌면 모일 일이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하나, 같은 시대의 대한민국을 공유한다는 우연뿐이다. 페미니즘이 물결치는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 이렇듯 다양한 군상을 한 책에 집합시킬 땐, 보통 스테인드글라스마냥 인물에게 할당된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접합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윤이형 작가는 소설 구성에 있어 시간이 아니라 사람을 선택했다. SNS를 통해 타인을 팔로하듯 동시대를 사는 이들을 가볍게 연결하고선 그들의 교집합을 묵직하고 집요하게 탐구한다. 누가 말했던가. 진실은 입체적이라고. 한 측면에서 본 부분만으로 완전한 전체를 구성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마 한 여성의 시각만으로 페미니즘 또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작가의 판단은 작중 긴장감을 훌륭하게 유지하는 데에 공헌했고, 메시지를 유효케 한 멋진 모험이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언뜻 영국의 극작가 처칠이 『Top Girls』에서 시간을 허물고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과 근원적인 발상이 비슷함에도 전혀 다른 체험을 제공했다.
『Top Girls』와 달리, 본 소설 내 여성들의 고민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너무도 다르다. 어째서인가? 부분은 전체의 영향을 받기에 그렇다. 새로운 신념 체계는 사회의 균열 속에서 태어나지만, 신념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상식으로 통용되었던 규범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예컨대 ‘결코 단일한 집단이 아닌 그들을 끝끝내 단일한 혐오 집단으로 몰려는’ 사회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지현조차 새로운 사회의 일원이 된 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과 다른 삶을 영위하는 여성들을 쉽게 단일한 집단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며 거친 말을 쏟아부은 이력이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그의 소설 『베어 타운』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랑은 어렵다. 요구사항이 많다. 증오는 간단하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태어난 해결책조차 상대를 공격할 도구로 변질되는 일은 지나치게 빈번하다. 경혜와 채이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기꺼이 손 내밀고자 해도 손을 주저케 만드는 힘은 사방에 포진한다. 경혜도 채이도 이해할 수 있기에 제삼자인 독자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같은 대지 위에 발 딛고 서 있음에도 인물마다 마주하는 장면들은 이토록 다르다. 용기는 고상한 가치지만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 조각과도 같아서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럽다. 내 용기가 처참하게 깨져 전달하려던 상대마저 깊게 찔릴까 두렵다. 연대라는 연약한 끈까지 영영 끊어질까 봐. 아무리 명옥과 효령처럼 실리를 추구하며 존재하지 않는 법의 토대가 되려는 이들이 있더라도 이들은 너무나 쉽게, 기록하지 않아 흩날리는 역사가 된다.
어쩌면 『붕대 감기』가 한 명의 주인공과 하나의 흐름을 내세우지 않는 건 운명과도 같은 결정이었으리라. 모두가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하여, 모두 기록할 수 없었던 사실을 위해서. 인간은 왜 붕대를 발명했을까? 상처를 마법처럼 치유하진 못할지언정 지혈하고 지지할 근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왜 교련 시간에 진경과 세연은 붕대를 감아야 했을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협 속을 견디던 한국 사회가 국민에게 최상의 예방책을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이었고, 사실, 전쟁만큼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붕대를 조금쯤 잘못 감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였다. 그 깨달음은 희미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떠돌다 몇십 년이 지난 후 느지막이 다가왔다, 손으로 감각할 수 있던 흰 붕대는 투명한 우정과 연대가 되어 돌아왔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희망이 잠들어 있듯, 『붕대 감기』는 잠든 서균으로 소설을 시작했다. 정답 없는 어둠을 걷는 여성이 적지 않음에도 소설은 절망만 거듭하지 않았다. 어찌어찌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겐 성공으로 비쳐 보일 수 있다는 건 유의미한 통찰을 제시한다. 어떻게 온 세상의 개인이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계획하더라도 출발점이 다른 이상, 각자가 지닌 예산이 다른 이상 우리는 자신의 상황에 맞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단숨에 도착할지라도 또 어떤 이는 오랜 시간을 공들여 어찌어찌 힘겹게 도착할 것이다. 타인을 기다리는 이도 있을 테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음을 깨달아 다시금 새로운 여정을 꾸리는 이도 있을 거다. 그러하니 작품의 제목이 ‘붕대’가 아닌 ‘붕대 감기’라는 ‘행위’라는 건 많은 깨달음을 시사한다. 실수하더라도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어찌어찌 붕대로 감아주는 건, 완전하지 않더라도 내 아픔을 감싸 안으려는 상대를 품어줄 이유를 제공한다. 우리에겐 서툰 접점이었을지라도 외부에선 지나칠 수 없는 시작점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그러하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이의 순수함을 닮은 관용과 그 관용을 펼칠 용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