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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Oct 22. 2021

영화 <무간도(2002)> 리뷰

영화는 언제나 사회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시대의 문맥을 제하고 무언가를 읽어 내리는 노력은 유의미하더라도 완전하긴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무간도(2002)> 만큼은 당대 어지러운 홍콩의 사정을 잠시 접어두고 리뷰를 남기고 싶다. 뭐랄까, 외국인인 내가 감히 반환을 앞두고 홍콩인들이 겪었을 우려에 말을 얹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일 수도 있을 테고, 중국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2021년의 홍콩을 지켜보는 이의 속절없는 무력감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이유조차 모두 덮어두고서.



기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은 결국 검은 화면에 흰 글자로 담백하게 띄우는 영화의 몇 마디인 ‘무간지옥에 빠진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는 말 자체일 것이다. 이 짧은 문장이 주는 충격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까. 각본은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를 촘촘하게 엮어내는 데에 성공하여, 심플한 구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영화 <무간도>는 하나의 재난같다. 관객은 영화 속으로 추락하고 관객을 흡수한 영화는 충돌한 우리를 빠른 호흡으로 몰아붙인다. 고통의 바다 속에서 우리는 진영인(양조위)과 함께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이토록 감각하게 되는 느와르 영화


<무간도>는 홍콩 느와르 영화로, 경찰과 삼합회 내부에 잠입한 스파이라는 존재가 영화의 주요 인물인 만큼 하드보일드한 요소를 적극 수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이밖에도 장르적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클로즈업이나, 불안한 앵글과 같은 요소를 다양하게 활용했다). 이런 점에서, <무간도>에서 어쩐지 뇌리에 박혔던 대사 중 하나를 인용하자면 아강(두문택)의 것이리라. 스파이가 아니었으나 삼합회의 조직원이었던 그는 영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일을 하며 형을 몰래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경찰이야.” 단순한 조직원이 아니라 스파이였던 그에겐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적인 요소에 모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관객 역시 이런 부분에 집중하여 영화를 감상한다면 보다 풍성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그들의 세계에 몰래 발을 디딘 자들이므로.



아울러 청각적인 요소가 심리적 긴장감을 높이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유건명(유덕화)과 진영인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 오디오샵이었던 건 어쩌면 많은 계산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밖에도, 진영인이 유건명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하필이면 녹음 테이프였던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의 감각적인 요소들이 섬세하게 배치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경찰이라 정의하지만, 경찰로서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진영인이 사용하는 것이 모스부호 소리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스파이의 정체성이라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인간의 정체성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얼마전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MBTI 검사조차 결과는 고정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스파이인 영인과 건명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상이 된다. 두 사람의 정체성은 손쉽게 잘라 이야기할 수 없다. 나는 경찰이기에 빛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영인의 말이 어쩐지 처절하게 들리는 까닭은, 그가 상당수의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기 때문이며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를 집념에 가깝게 신뢰하고 있어야만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형광등이 아닌 날 것 그 자체의 빛을 받기 위해 그는 끝없이 위로, 위로 향한다. 옥상 위에서 영인과 건명은 대치한다. 영인이 인내해온 부조리한 날들이 종결되리라 믿었던 찰나, 세상은 그를 토해낸다. 빛을 한껏 받았던 그가 건물 안으로 돌아가, 수직적으로 하강하는 차디찬 엘레베이터 내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 장면은 눈 앞이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다만 영화 직후의 감정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생각을 갈무리하니 나는 묻고싶다. 무간도가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며 삶이 곧 고固라면, 세상은 그 자체가 무간지옥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인생이라는 기나긴 길을 통해 끝없이 지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러하므로 영인의 죽음은 그 자체로 해방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끝내 풀릴 수 없는 문제라면 어쩌면, 검으로 단호하게 잘라내는 것만이 해답일 지도 모른다고. (아마 이런 내 생각은 씁쓸한 자기 위로에 불과하겠으나, 영인에게 더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다만 이 영화가 비관적인 메시지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느와르 필름이라는 장르적 문법에 충실했기에 영화 속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이 한 이유다. 또한, 우리는 영화를 모두 감상하고 영화관을 나섬으로써 어둠으로부터 탈피하게 된다는 영화 감상의 구조적 설계 때문이기도 하다. 파란 채도의 지옥은 우리의 뒤에 있을 뿐, 우리는 어두운 상영관 밖의 빛과 함께 살아갈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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