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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Dec 01. 2022

다큐<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사건>리뷰

초미학시대, 환상과 허상은 동의어가 되고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쉽게 지나갈 수 있을까. 내가 넷플릭스에서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 사건(이하 당신의 눈을 속이다)>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다큐멘터리를 튼 건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예술의 역사만큼 위작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기실, 인간의 욕망과 돈이 결합된 분야라면 스캔들이 없을 수가 없다. 가치가 높은 대상이라면 스캔들의 폭은 더욱 넓고 깊어지리라. 당장 떠오르는 스캔들만 해도 적지 않다. 베르메르 위작으로 유명한 반 메헤렌은 물론이요, 올해 미국 올랜도 미술관에서 발생한 바스키아 위작 스캔들도 있다. 시선을 국내로 돌린다 해도 이중섭과 박수근의 작품으로 인해 미술계가 크게 흔들렸던 적이 고작 5년 전이다. 어쩌면 위작 스캔들은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갤러리라면 어디든, 또한 누구든 안고 있는 점화되기 전의 폭탄일 터다. 그러하므로 내가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기 전 가장 궁금해했던 건 이런 것이었다. 165년 전통을 자랑하는 갤러리가 위작 스캔들에 휘말렸던 이 사건을 대체 왜 공개했을까? (만일 다큐멘터리의 목표가 갤러리의 무고함을 밝히는 것이라면) 이미 자취를 감춘 갤러리의 결백을 주장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출처: Netflix



일단 <당신의 눈을 속이다>가 다루는 사건은 위에서 언급한 노들러 갤러리 스캔들이다. 이 사건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노들러 갤러리는 1846년에 문을 연, 긴 역사를 지닌 명망 있는 갤러리인데, 본디 1950년대 추상 표현주의에 퍽 취약했다. 그런데 어느 날, 노들러 갤러리의 전 직원이 글라피라 로잘레스라는 (자칭) 미술품 중개인을 노들러 갤러리의 전 관장이었던 앤 프리드먼에게 소개하였고, 글라피라는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과 등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화가의 그림을 거뜬히 가져왔다. 가문의 힘조차 업지 않았던 글라피라의 수완은 정말이지 대단했던 모양이다. 노들러 갤러리는 그를 통해 거의 20년 동안 60여 개의 위작을 판매하며, 총 8천만 달러(약 1,054억 원) 규모의 사기에 발을 디뎠다. 단순한 개인과의 거래였다 해도 문제가 작지 않을 텐데, 일류 컬렉터와 유명한 미술관들도 노들러 갤러리에서 위작을 구매했으니 미술계가 발칵 뒤집힌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앤 프리드먼이 Freedman Art라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사안은 종결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는 수사극, 추리극의 형태라기보단 일종의 인터뷰의 연속체로 기능하는 듯하다. 제작진은 영리하게도 시청자에게 결정권을 넘겨주는 방법을 택했다. 사법부가 호명한 피의자가 이미 명확히 존재하는 만큼, 굳이 다른 이를 지목하는 자극적인 방식을 택하지 않고, 어떻게 이 ‘파렴치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느슨하게 재구성한다. 이를테면 그들의 태도는 이런 식이다. 사건은 이미 발생했다. 사기꾼이 있는 건 분명한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기꾼의 범주인지를 밝히는 게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부분을 재조명하고 싶다. <당신의 눈을 속이다>에는 그렇게 초대받은 예술계 인사들과 심리학자가 있으며 모두가 한통속이라며 억울함을 강력히 호소하는 피해자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첨언하는 기자가 있다.


 

출처: IMDb

사기꾼의 경계를 결정하기 전, 시청자라면 앤 프리드먼을 딱하게 여기든, 수상쩍게 여기든 ‘어떻게 그들이 취급한 작품이 위작이라는 걸 모를 수가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앤 프리드먼은 누구든 자신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위작임을 알 수 없었으리라고, 자신 역시 많은 노력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폐쇄적인 예술계의 특성상 특별한 이유 없이 감정을 맡기는 것 자체를 노들러 갤러리의 명성에 흠이 간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갤러리의 주인 측에서 압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또한 위작은 인류의 역사 내내 번번하게 유통되었고 카렐 아펠 등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때로는 작가들조차 진품과 가품을 판별하지 못하니, 그의 말이 정당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이었던 토머스 호빙조차 자신이 15년간 살펴본 미술품 중 40%가량이 위작이었다고 말한 바 있지 않은가. 만일 프리드먼이 명예욕과 금전욕에 의해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그의 잘못은 앤의 말마따나 ‘미술품과 사랑에 빠져’ 관습적으로 일을 처리한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명예욕에서든, 금전욕에서든 그가 “위험 신호를 무시”했다는 사실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IFAR에서의 감식 결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 허술한 프로비넌스를 눈 감은 것, 친분 있는 학자에게만 기댔던 것, 피상적인 몇 개의 견해에만 귀 기울이며 모든 신호들을 대수롭지 않지 여긴 시간들은 단숨에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그러나 앤 프리드먼의 동기가 어떠하든, 위작 구매자이자 사건의 피해자인 아트 컬렉터 데 솔레 부부의 분노를 달래는 데엔 역부족이다. 소더비, 톰 포드 인터내셔널 회장이라는 명성과 자부심에도 흠집이 생겼고, 금전적으로도 손해를 보았으며,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에서 시간 싸움까지 진행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동시에 미술계의 특수성에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때로는 이렇게 믿을만한 이력서조차 없는 작품을, 화랑의 명성 혹은 딜러와의 친분만으로 거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왜곡된 시장이지 않은가? 작품 감별을 위해 활용하는 방법이 고작 프로비넌스를 확인하며 극장의 우상에 기대는 것에 불과하다니. 무려 하나의 작품에 800만 달러를 지불하면서!


물론 미술계가 위작에 대해 늘 침묵하는 건 아니다. 당연하지만 모든 갤러리가 이토록 허술하진 않을 것이며, 위작 감별에 관한 전문가들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위작 거래를 최소화하기 위해 투명한 거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엄정한 처벌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일까?


출처: IMDb


값어치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던 그림은 위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 앤 프리드먼의 변호사의, 루크 니카스의 사무실에 걸린 벽화가 되어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 정교한 위작이라는 걸 알기 전 감상자들이 경험했다는 작품의 아우라는 대체 언제 증발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노양진의 해석을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물리적 대상은 유기체의 기호적 경험, 즉 우리의 ‘기호적 사상’을 통해서 비로소 기호적 해석의 대상인 ‘기표’가 된다(노양진, 2020)”고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작품의 가치는 작품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작품 외부에 있다는 이야기다. 위작이 활개를 치는 미술시장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미술품 외부에 있는 우리의 인식을 해체하고 바꾸는 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시장이 예술을, 혹은 예술이 시장을 적극적으로 삼켜버린 시대이므로. MZ세대의 아트테크 열풍과 같은 기사가 신문의 경제면을 휩쓸고, 이제 손에 쥘 수도 없는 토큰인 NFT를 이용해 작품을 쪼개어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동시에 예술은 뒤샹과 워홀의 등장 이후 소비 이데올로기 하위에 존재하던 온갖 상품까지 넉넉하게 받아들였다. 보드리야르의 입장을 알고 있었다지만, 예술의 종말은 진작부터 거론되었다지만, “예술이 그저 상품으로만 남을 것인가?”따위의 질문이 아니라, “어쩌면 미술품이란 ‘상품’이라는 속성이 본질임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 많은 가치를 입혀 두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야말로 피부로 느껴지는 듯하여 나는 두렵다.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능력을 꺾어버리고, 사유를 헐값에 거래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가 어떠한 도덕적 양태를 잉태하거나 공유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출처: IMDb


같은 작품이라 해도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메시지를 읽어낸다.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읽어낸 메시지는 앤 프리드먼이 운 좋게 풀려난 범죄자가 맞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었다. 21세기의 미술품은, 그 어느 때보다 상업 기호에 가까워졌다는 것. 어쩌면 ‘기호’조차 사라지고 예술이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당신은, 아니 어쩌면 나는, 한때나마 예술이 존재했다는 흔적만을 쥔 채,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오로지 그뿐이다.




참고문헌

노양진 "기호의 역전" 담화와 인지 27.3 pp.47-62 (2020)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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