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미국 록 밴드 보이즈 라이크 걸스(Boys like girls)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10년 만의 내한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들었던 노래를 처음으로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공연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공연 당일 나는 무대에서 멀지 않은 스탠딩 석에 자리를 잡았고, 밤 8시 30분이 되자 관객석을 비추는 조명이 툭 꺼지며 콘서트의 시작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밴드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와아아-'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곧이어 들리는 익숙한 기타 소리에 나와 관객들은 리듬에 맞춰 머리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걸 찍어, 말어?
콘서트와 페스티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약 8년. 그동안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들을 연달아 재생하면 꼬박 며칠이 걸릴 것이다. 주로 해외 아티스트의 내한 콘서트를 많이 갔던지라 지금이 아니면 이 가수를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녹화 버튼을 눌렀다. 아니면 가장 좋아하는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나 공연장의 즐거운 분위기를 담아두려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공연이 끝난 후 가끔 추억을 곱씹고 싶을 때 영상들을 돌려봤다. 내가 직접 찍은 영상을 보면 이미 지나간 그 순간이 다시 되살아난 것처럼 가슴에서 흥분이 솟아올랐다. 나는 찰나의 행복을, 즐거움을, 관객석의 열기와 에너지를 다시 눈으로 볼 수 있게 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곱씹을 만한 영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만큼 대가가 필요하다. 공연을 보는 중에 찍고 싶은 대상을 골라야 하고, 언제 휴대폰을 꺼내 들지 정해야 한다. 멋진 장면을 찍고 싶으니 녹화 버튼을 아무 때나 누를 수도 없다. '이따 하이라이트 부분이 나오면 찍어야지.', '처음부터 찍을까, 아니면 관객들이 떼창을 시작하는 부분부터 찍을까?' 찍기 시작하면 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정해야 한다. 영상의 퀄리티는 잠시 잊고 무대를 볼지, SNS에 올릴 만한 깔끔한 영상을 위해 휴대폰을 볼 지. 이렇게 고민하느라 여기를 보다가, 저기를 보다가 난리도 아니다. 그리고 녹화 중에는 내 목소리가 녹음되기 때문에 떼창도 못한다. 몇 년 만의 내한인데 노래도 목청껏 못 부르다니! 이러면 기다린 보람이 없지 않은가.
아이고 바쁘다 바빠. 노래 한 곡은 4분이 채 안 되는데 머리는 팽팽 돌아간다. 그래서 '그냥 찍지 말까? 온전히 무대를 즐기고 싶어.' 지금 당장 행복하고 싶은 나와, '에이, 그래도 대충이라도 찍어두면 나중에 두고두고 볼 수 있으니까 30초라도 찍어야지.' 나중에도 오랫동안 행복하고 싶은 내가 매번 충돌했다. 결국 안 찍은 날에는 영상이 없다는 아쉬움이 남았고, 찍은 날에는 무대를 온전히 못 즐겼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공연을 볼 때마다 '찍을까 말까?' 딜레마에 빠졌다. 찍고 있자니 무대를 놓치는 것 같고, 안 찍으면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반복되었다.
이런 정신상태로 보이즈 라이크 걸스의 콘서트를 즐기고 있던 그때, 가장 유명한 곡인 'The great escape'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내 팔뚝에는 소름이 돋았고 관객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휴대폰을 들어 촬영을 시작했다. 내 눈앞은 순식간에 빛나는 네모로 가득 찼고 사람들이 치켜든 팔에 눈앞이 가려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쥐고 한 손은 허공에 올리고 노래하며 열심히 뛰었다. 공연장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노래가 갑자기 뚝 끊겼다.
1절만 부르고 끝난 것이었다. 뭐지, 왜 이 노래를 중간에 끊었지?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의아해하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다시 마이크를 잡은 보컬 마틴의 말. "카메라 꺼요! 모두가 영상을 찍고 있네요. 앞으로 남은 3분 30초 동안 우리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부를 겁니다. 휴대폰 없이요." 그제야 이해됐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멋쩍어하며 휴대폰을 주섬주섬 내리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Let's go back to 2006." 2006년으로 돌아갑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객들에게서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2006년은 'The great escape'가 발매된 해였다. 왠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마틴이 이어 말했다. "저는 틱톡, 유튜브 같은 곳에서 이 영상을 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들이 위아래로 뛰고 소리 지르는 모습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으세요. 이 순간은 우리끼리만 보는 걸로 해요. 오늘 정말 멋진 밤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다시 전주가 흘러나왔고, 그 무대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귀가 떨어질 것 같은 기타 소리와 함성소리에 뒤섞여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렀던 것, 가벼워진 두 손을 높이 올리고 무릎이 부서져라 뛰었던 것,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 같이 미쳐있던 주변의 관객들, 눈앞에서 빛나던 네모는 모두 사라지고 락앤롤 손가락 모양을 한 손들이 움직이던 모습은 그대로 뇌리에 박혔다. '오늘 밤 우리는 마침내 자유로워졌어'라고 말하는 'The great escape'의 노래 가사처럼, 나는 그날 밤 휴대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영상이 없으면 뭐 어떤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한 기억이 남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