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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연필 Oct 20. 2016

실수를 향한 잔인한 질문

눈이 부셔서 잠을 깨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옥수동 옥상 집은 현관문 앞에 두 평 정도의 마당이 있었고, 항상 그 자리에는 햇빛이 가득했다. 밖에 내놓은 식물들은 동화책 속에서 봤던 마법의 씨앗처럼, 어떤 날은 꽃을 피웠고 어떤 날은 색이 변하는 신기한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일 거라 생각했다.


디즈니 만화동산이 끝날 무렵, 우유에 죠리퐁을 말아먹는 것보다 더 맛있는 게 있다고 말했던걸 기억하시고 엄마는 나에게 지폐 몇 장을 주시며 이렇게 말하셨다.

 "호랑인지 뭔지 그 죠리퐁보다 맛있는 거 사와, 우유랑 같이"


세상에서 그렇게 달콤한 말이 있었을까 싶었다. 뜻밖의 선물이란 기쁨을 느낀 최초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방방 뛰며 엄마의 오른쪽 다리를 꽉 껴안았다. 내 동생도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다. 고맙습니다를 3번을 넘게 크게 외치고 우리는 달렸다. 옥상 3층에서 2층으로.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엄마의 천천히 가라 다친다 라는 소리는 들릴 리가 없었다. 동생과 나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에 들린 지폐로 호랑이가 그려진 시리얼을 사러 달릴 뿐.


그렇게 우리가 느낀 기쁨은, 딱 30초 정도였다. 푸른색의 대문 난간을 넘을 때 나는 발을 헛디뎠고, 옆집 콘크리트 계단에 왼쪽 이마 끝을 찍고 말았다. 나를 본 내 동생과 너무도 아픈 충격에 할 말을 잃은 나는, 3초간 침묵했다. 4초쯤 지났을까 세상에서 가장 큰 두려움을 처음 느꼈다. 가장 큰 기쁨을 만끽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내 동생이 울며 엄마를 불렀다. 나도 울었다. 너무 무서웠다. 내 왼쪽 얼굴은 찢어진 이마에서 흐른 피로 뜨거워졌다. 아픔보다 피의 온도가 더 확연이 와 닿았다. 온몸이 떨렸다. 너무도 서러웠다. 내가 엄마 말만 듣고 천천히 갔으면 이런 실수가 없을 텐데 라며 후회했다. 사실 아파서 울었던 게 아니었다. 곧 내려오며 놀랄 엄마의 얼굴과, 소리치며 엄마에게 뭐라고 할 아빠의 얼굴이 두려웠다.


예상대로 엄마와 아빠가 내려왔다. 집주인 아주머니도 소리에 놀랐는지 급하게 나왔다. 엄마는 맨발로 내려와 나를 보고 사색이 되었다. 차분히 괜찮다고 말하시려 했지만, 아무 말 없이 이마를 누른 채 다시 3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아빠는 나와 엄마에게 욕과 알 수 없는 큰소리를 치며 나를 내려다봤다. 난 누워있었고, 엄마의 얼굴, 내 동생, 아빠의 얼굴을 본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고 하얀 옷을 입은 형 누나들은 소독물을 두통을 연달아 내 이마에 부었다. 이후 상처를 꿰맨 상황은 기억할 수 없다. 너무 아팠던 것 같다.


따뜻했던 햇빛의 일요일은 항상 평화롭고 조용했는데, 나는 그 규칙을 깬 기분이었다. 나 때문에 아빠와 큰소리로 싸우게 된 엄마한테 미안했다. 어렸지만, 분명하게 느꼈다. 

왼쪽 이마가 찢어진 아픔보다, 

소독약을 부으며 느끼는 쓰림보다, 

상처를 꿰맨 실을 푸는 순간보다, 

나 때문에 힘든 엄마의 아픔이 더 아팠다. 이유 없이 죠리퐁만 보면 눈물이 났다. 그렇게 일요일은, 이젠 평화롭고 따뜻하지 않게 됐다. 그냥 어둡고 슬픈 날로 한 동안 기억했다.








왜 우리는 실수를 하는 걸까.


바둑 천재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란 인공지능을 만든 그런 인간인데. 왜 어울리지 않게 실수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인간은 하는 걸까.


괴테의 말처럼 단순히 실수라는 것이 '인간적'이란 범위 안에 있는 하나인 것일까. 실수를 안 했다면 시도를 안 한 것이라는 그 말이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실수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누구나 하는 거'라고 느끼고 그냥 지나갔다.


실수는 치명적이다. 계속 생각나게 하고, 자책을 부른다. 일명 멘탈이 강한 사람들도 자신의 실수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우리에겐 실수라는 것은 불청객일 뿐이다.


만약, 먹고 싶은 시리얼을 사러 가다 넘어진 아이에게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물어본다면, 그 아이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너무 먹고 싶어서 흥분했어요.'

'달리는 것에 집중을 못했어요.'

'대문 앞 난간을 잘 보지 못했어요.'


그러면


'아 그랬구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엔 조심하렴' 하고 넘어갈까.

또는 '그건 핑계야. 조심했어야지'라고 다그칠까.


수 없이 실수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 생각해보자. 가장 솔직한 대답은 '그 실수로 인해 내가 속상하고 손해를 봤으니 사과하고 뉘우치길 바란다'가 아닐까.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질문은 마법이다. '왜'라는 질문은 많은 것을 발견하게 해 주고, 우리를 이롭게 해주는 이로운 질문이 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독과 같아서 안 그래도 아픈 환자를 끝없이 괴롭게 만든다.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가족이든, 친구든

그 누군가가 실수를 했다면, 왜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란 걸 우린 알 필요가 있다. 그냥 그 실수로 벌어진 상황을 함께 수습하는 것만으로, 그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아닐까. 실수 후에 오는 자신과의 시간에선, 우리가 상상 못 할 큰 아픔과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이기에.


어린이가 큰 것이 성인이고, 성인의 예전이 어린이다.

어린이도 인간이고, 성인도 인간이다.

결국 인간적이란 범위 안에 속한 이 실수는 눈, 코, 입과 같은 하나의 공통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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